한국의 군주/고려의 군주

17대 인종(고려)

Mintaka5 2024. 8. 3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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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jong de Goryeo, 1109~1146, 재위1122~1146

 

 

출생

1109년 고려 개경 개성부 순덕왕후 사저에서 아버지 예종(1079~1122, 재위1105~1122)과 어머니 순덕황후 이씨(문경태후, 이자겸의 둘째 딸, 1094~1118)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왕해.

 

배경

고려의 전성기가 끝나고 쇠퇴기를 맞이하게되는 첫 군주이다.

1122년 아버지 예종이 승하하고 외조부 이자겸이 사실상 반강제로 인종을 옹립시켰다. 외척세력의 최고권력자이자 중신 이자겸은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의 3녀, 4녀를 인종에게 시집보내면서까지 해 군주의 장인이 된다(이모와 결혼한 것).

그러나 그 아무도 이자겸을 건들지 못하는데, 이자겸에겐 든든한 빽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한국사 최고의 소드마스터로 불리는 척준경(?~1144)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

 

즉위

1115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위의 배경과 마찬가지로 1122년 아버지 예종이 승하하자마자 외조부에 의해 반강제로 즉위된다.

 

이자겸의 난

이자겸(1050~1127)은 예종과 인종의 장인이자(2녀 순덕왕후 이씨는 예종의 황후, 3녀 연덕궁주는 인종의 황후였다가 폐후가 됨, 4녀 복창원주역시 인종의 황후였다가 폐후가 됨)인종의 외조부이기도 한 인물로서 외손자 인종을 옹립시켜 사실상 정권을 움켜쥐며 인종을 쥐고 흔드는 권신이였다. 황위를 찬탈하여 인종을 몰아내고 고려의 군주가 되고싶어했던 인물이다. 그 야욕은 점점 커지게 되는데, 척준경이라는 든든한 군사적 빽이 있던 그로서는 두려울 게 없었다.

이 둘은 서로 사돈지간까지 되며(사실상 이자겸이 척준경을 자기세력으로 만들기위해.. 척준경의 딸과 이자겸의 아들이 결혼, 이자겸의 5남이 척준경의 사위)같이 우리가 남이가를 시전한다. 동시에 이자겸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척준경가족또한 요직에 오른다. 

인종은 1122년 재위에 오르면서부터 이자겸에게 사실상 휘둘리는 허수아비 군주나 다름없었는데, 재위 후 4년동안 이에 시달리면서 불만이 계속 쌓여 커짐에 따라 이 둘을 제거할 계획을 짜게 된다. 인종은 이에 무인들중 마침 척준경을 싫어했던(척준경 동생들이 낙하산으로 자기들보다 훨 높은곳으로 빨리 올라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무장들에게 이자겸, 척준경을 척살할 것을 명한다. 1126년 2월 인종의 명을받은 이들이 척준경의 아들 척순(1088~1126),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1071~1126)을 죽이는데 성공, 이외에 이들을 따르던 무리들을 모두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제거하지 못한 무리중 한명이 이자겸에게 이사건을 알린다.

이사건을 들은 이자겸, 척준경일파들은 군대를 이끌고 개경 왕궁을 공략하고자 진군하여 궁을 불태워버리면서 인조가 이자겸의 자택에 머무르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이자겸이 본격적으로 인종을 주살하고 황위를 찬탈하려는 움직임(십팔자위왕:십팔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왕이된다라는 뜻으로 한자 십팔자를 합치면 '이'씨성의 한자가 되는것으로, 이씨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된다 라는 뜻)을 보이지만, 이자겸의 두딸(인종의 왕비)가 이를 눈치채고 독이 든 떡을 일부러 흘리는등 기지를 보이면서 이자겸의 인종 주살 계획은 실패. 인종은 이에 이자겸의 든든한 빽 척준경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생각을 내는데, 내의군기소감 최사전(1067~1139)통해 척준경을 설득하게 함으로서, 인종이 직접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려 지난일은 잊겠다는 등 당부를 하여 위로하니 척준경의 마음이 슬슬 바뀌기 시작하는데..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들이 궁을 불태운 죄를 비난하게 되면서 척준경이 이를 알게되어 이때부터 둘사이에 불화가 시작되면서 인종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일파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자겸은 귀양보내지고 인종의 왕비였던 두 딸모두 폐위가 되지만 인종이 앞서 이자겸이 독살하려고 했던 것을 막았던 두 폐비들을 극진히 보살피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끔 최대한 지원해준다. 

 

또 난... 묘청의 난..... 아이고난

이자겸의 난을 계기로 인종은 왕궁이 있는 개경자체가 터가 안좋다고 생각하던 터 승려 묘청(?~1135)이 인종에게 풍수지리설로 개경자체가 지덕이 쇠약하다고 한술 더 뜨게 역설해버리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서경(평양)으로 천도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종은 서경에 자주 방문하면서 서경 내 명당자리를 보게끔 해서 그 자리에 대화궁(고려 군주의 별궁)을 짓게끔 명한다. 앞서 고려의 다른군주 글들에서도 봤듯이 천도를 하고자했던 3대 정종(923~949, 재위945~949)등이 새로운 도시에 새 세력을 세워 황권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는데 인종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묘청의 말대로 인종이 대화궁을 설치하고 이제 액운은 없다고 하지만 계속 안좋은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고 기상이변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묘청을 처벌해야한다는 여론이 나오게 되면서, 개경에서도 개경파 김부식(1075~1151)을 포함한 대신들이 서경 천도 반대를 외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묘청은 이에 서경에 황명으로 세워진 대화궁을 자신의 궁으로 만들어버리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로 하는 대위국(1135~1136)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묘청의 난(1135~1136)이다. 천도목적으로 만든 대화궁에 묘청이 들어가 눌러앉아 군주가 되게끔 해준꼴..

인종은 일단은 사신을 보내 반란을 멈추라고 했지만, 묘청은 그럴싸한 말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다시 충성하겠다는 지금와서도 믿기 힘든 궤변을 놓음과 동시에 조정에서는 이들을 토벌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김부식()을 원수로 하여 진압군을 서경으로 파견하여 군을 에워싸 항복을 여러차례 권유하는등의 최대한 피를 보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분도 부족했고 진압군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 묘청의 참모 조광()이 묘청을 포함한 측근을 모두 목을 베어 항복의 의사를 표시하고 용서를 요청하지만 고려 정부에서 가볍게 보지않고 항복사신으로 간 윤첨()을 옥에 가두면서 조광은 결사항전을 다짐. 

1년에 가까운 결사항전으로 진압군도 꽤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식량이 떨어진 서경내에서 불만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정보를 듣고 진압군이 1136년 모두 총공격해 서경진입에성공하지만 조광등 최측근들은 자살, 나머지는 항복하면서 1년간의 난이 종료된다. 

 

삼국사기

그리고 인종의 마지막 업적.. 1142년경 김부식이 정계에서 은퇴를 한 시점(이때부터 편찬을 했는지는 아직 명확하진 않으나 유력한 설로서 자리잡음) 삼국사기(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역사)편찬을 김부식에게 명하여 1145년 완성을 보게된다. 

 

승하

1146년 38세를 일기로 태자(미래의 의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병으로 승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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