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고려의 군주

4대 광종

Mintaka5 2024. 8. 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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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jong, 925~975, 재위949~975

 

 

출생

925년 아버지 태조(왕건, 877~943, 재위918~943)와 제3후비인 어머니 신명순성왕후 유씨(충주부인, ?~?)사이에서 태어남. 위로는 형 태자 왕태(미상), 왕요(3대 정종923~949, 재위945~949)이 있다. 본명은 왕소.

 

배경

형이 두명이나 있어서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는데, 이복 형 혜종(912~945, 재위943~945)이 병약하여 일찍 서거하고, 태자인 형 왕태가 일찍 요절하면서 형 왕요와 함께 유력한 계승권자가 된다.

형 정종과는 성격이 달랐는데 (제국의 아침,2002~2003)이라는 사극에서 두 군주의 성격이 판이하게 드러나는데, 정종은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데 반해 광종은 치밀하고 신중하지만 한번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였다고 한다. 이미 어릴때부터 군주로서의 자질이 눈에 보일 정도.

 

행님 내 잊지마소

이복형 혜종이 945년 병으로 서거하면서, 동복형 왕요가 3대 정종(923~949, 재위945~949)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호족들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고려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 당사 호족세력의 권력이 커짐과 동시에 왕권이 축소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였는데, 이미 아버지 태조시대때부터 호족의 배신으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뻔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인식한 태조가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이복 남매들 사이의 혼인을 하게시켰다. 왕소역시 이복 여동생이였던 황보씨(대목왕후)와 결혼하게 된다.

이복형제간의 결혼은 신라 시대때부터 이어져오던 풍습에 따른 것으로서 외척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거란 태조의 계산이 작용하게 되면서, 이복형 혜종과도 별다른 마찰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고 본다. 

다시 돌아가서 정종이 즉위하면서부터 병에 걸려 오래 못 갈거라는 예상을 하면서 아들 경춘원군 대신에 왕소에게 선위하기로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했다고 한다.

 

즉위

949년 형 정종이 서거하게 되면서 왕소가 4대 광종(925~975, 재위949~975)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원년에  표준 녹봉을 정해 쌀을 차등있게 나누어주게끔 하는 원칙을 세우고, 세금을 거둘때 거둬질 액수를 정해 체계를 갖추게끔 하였다. 광종의 뒤에는 박수문, 박수경 형제가 있는데 이 둘은 아버지 태조시절때부터 후삼국통일의 일등공신으로서 평주의 호족으로서 왕성한 세력을 가지고있었는데 이 둘은 광종을 적극 지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호족세력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칭제건원

한국사를 배울때 광종하면 딱 나오는 대목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대목이다. 950년 즉위 2년차때 광종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않고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표하기에 이르는데 아버지 태조가 933년 천수라는 연호를 쓴 이후 17년만에 다시 만들어진 연호인 것. 그러나 '광덕'연호는 952년까지 쓰이는데 중국에서의 반발로인해 저때까지 쓰인것으로 본다.

960년에도 독자적인 연호 '준풍'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때는 아예 중국과 대등한 입장으로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개경을 '황도'로 서경을 '서도'로 칭하며 주체성을 심어놓게 된다. 이 연호는 963년까지 쓰이다가 당시 떠오르는 중원국가 송나라와 국교를 수립하면서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됨으로서 폐지된다.

 

중앙집권

야심찬 광종은 이전부터 사사건건 틈만나면 기회를 보고 달려들던 호족들을 없애버릴 계획을 하게되는데, 왕위에 오르기전 호족들이 즉위과정에서 보인 암투를 지켜봄으로서 숙청을 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바로 숙청하긴 힘드니 단계를 거쳐 차례차례..

그 첫번째가 노비안검법(노예해방, 955) 실시이다. 원래 노비가 아니였는데 전쟁포로가 되거나 빚을 갚지 못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평민으로 돌려놓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노비들은 호족들의 사병으로 쓰일 수 있는 존재였으므로 사실상 이들의 힘을 뺴놓고자 실시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호족과 공신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 그러나 광종의 확고한 마음으로 묵살. 

두번째는 과거제 실시. 후주 출신인 학자 쌍기(?~?)를 통해 개혁을 실시하게 되는데 쌍기는 당나라 과거 임용제도를 본떠 과거제를 실시할 것을 광종에게 건의하게 된다. 이렇게 과거제가 실시되게 되면서 뽑아들인 인재들은 광종이 직접 뽑기때문에 사실상 친위세력이 한층 더 늘어나게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이런식으로 호족과 싸울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6~7년동안이 걸렸는데, 마침내 호족을 뺀 계층모두의 지지를 받게되면서 숙청의 서막이 시작되게 된다.

 

숙청(숙청이라고 다 죽이는 건 아님)

960년부터 광종이 서거하는 975년까지는 숙청으로인해 피로 물든 시기로 봐도 과언이 아닐정도였다. 특히 광종은 왕권강화에 있어 걸림돌이 되거나 도전한다는 의심이라도 품은 자들에게는 자비가 없었는데, 호족은 기본이고 가까운 인척이라도 과감히 제거를 했다. 대표적으로 조카인 흥화궁군(혜종의 아들, ?~960)과 경춘원군(정종의 아들, ?~960)을 역모에 관련되어있다 해 처형, 심지어 태자 왕주(미래의 경종)까지 의심할 정도로 민감.

이뿐아니라 960년 1차 호족 숙청, 964년 2차 호족숙청엔 개국공신이자 든든하게 광종을 지지한 박수경 가족을 숙청, 970년엔 역시 개국공신이자 천문학자인 최지몽(907~987)을 강등시키는등 최지몽은 다행히 사형은 당하지 않는다.

 

말년

965년 장남 왕주(경종, 955~981, 재위975~981)를 태자로 책봉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광종이 태자마저 의심을 해버리는 바람에 태자 왕주는 목숨을 지키기위해 최대한 자신의 의견을 숨기며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971년, 972년에 걸쳐 발생한 지진으로 민심이 동요하면서 죄수들을 사면하는등 각각의 노력을 취해 민심을 달래고자 애쓴 흔적이 보인다.

975년 병으로 인해 서거하게 된다.

묘호는 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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