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jong de Goryeo, 955~981, 재위975~981
출생
955년 고려 황도 개주(개성시)에서 아버지 광종(925~975, 재위949~975)과 어머니 대목왕후 황보씨(?~?)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배경
심적으로 약한 군주였다고 하며, 아버지 광종대의 대숙청으로인해 조용히 쥐죽은듯이 지내 소심한 성격을 지녔었다고 한다. 아버지 광종대의 대숙청과 후임인 사촌 성종치세사이 중간에 끼여 고려사에서도 잘 눈에 띄이지 않는 군주이지만 나름대로 짧은 재위기간(6년)동안에 고려를 안정시켰다는 평을 받는 군주이다.
마 나도 연호 썼다
경종은 975년 아버지 광종이 서거하고 난 후 재위에 오르게 되면서 태평이라는 연호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와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연호도 갖다 썼다고 하는데, 송나라 송태종(939~997, 재위976~997)의 당시 연호가 태평흥국이였던 점을 감안해야 할 것.
보...복수법이라니?
즉위초기 20세가 넘었지만 975~976 1년간 호족 출신 왕선(?~?)이 섭정을 맞게되는데, 광종때 화를 입었던 사람의 자손들에게 복수할 수 있게끔 하는 복수법(복수를 허용하는 법)이 시행되게 되는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게 복수의 범위가 정해져있지 않아 모든 백성들과 호족들이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되어버리게 된 것.
문제는 왕선이 976년 대리청정시기때 경종의 삼촌들인 효성태자(?~976)와 원녕태자(?~976)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해버리면서 심각성을 깨달은 경종은 왕선의 직위를 해제하고 유배보내기에 이르고, 복수법폐지와 동시에 복수법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른 모든 백성, 호족들을 처벌했다.
이 사건이후로 경종은 후회가 막심했는지 최승로(927~989)에게 976~977년까지 대리청정을 맡긴다. 이후 최승로는 경종사후 시무28조(982년)에서 경종의 복수법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
복수법 때문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정치에 환멸을 느낀 경종은 이후 정사를 멀리하고 술과 바둑에 빠져지내게 된다.
나도 업적은 있다 임마..
물론 업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전시과(976)를 제정해 토지제도의 기초를 마련한 것. 이는 벼슬에 오른이들에게 녹봉으로 토지를 나누어주던 제도로서 문관, 무관,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지급 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지금으로 치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이라 관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지급되고, 관직에서 물러날때나 사망할 시 국가로 다시 환수되는 시스템이였다(토지 단위는 '결', 1결면적=약1ha).
또 아버지 광종시절부터 자리잡게된 과거제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면서 나름 안정적인 정치를 해나가긴 한다.
서거
981년 6월 병에 들며 원래는 아들 2대 개령군 왕송(미래의 목종, 980~1009, 재위997~1009)에게 양위하려 했지만 1살의 왕송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반드시 뺏길거라는 우려에 사촌동생 초대 개령군 왕치(성종, 961~997, 재위981~997)에게 양위하게 되면서 상왕으로 물러나고 물러난지 1달만에 서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