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조선의 군주

17대 효종

Mintaka5 2024. 8. 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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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ojong, 1619~1659, 재위1649~1659

 

 

 

출생

1619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본궁에서 아버지 능양군(16대 인조, 1595~1649, 재위1623~1649)과 어머니 청성현부인 한씨(인열왕후, 1594~1636)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남. 위로는 형 소현세자 이왕(1612~1645)이 있다.

 

배경

1623년 4살무렵일때 아버지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15대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을 폐위시키고 아버지 능양군이 16대 인조로 즉위하여 형 소현세자와 함께 궁에 입궁하였고, 1625년 형 이왕이 소현세자로서 왕세자에 책봉되고, 1626년 본인은 봉림대군으로 봉해진다.

 

이인거의 난

원래부터 행실이 모가나고 거짓말을 잘하던 이인거라는 인물은 반란의 뜻도 품었었지만, 기회가없어서 쥐죽은듯이 조용히 있다가 마침 1623년 인조반정이후 공신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 백성으로부터 여러 불만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반란의 뜻을 품는데, 이때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킬 음모를 꾸게 된다. 

이인거는 1627년 자신이 직접 쓴 '소'를 강원감사 최현에게 소를 조정에 올려줄 것을 부탁하지만, 최현은 잘못된 생각이라 생각하면서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이를 올려줬다고 믿었던 이인거는 군사10명을 통해.. 난을 일으키지만 강원도 횡성현 현감이 이 난으로 원주목으로 달려가 그곳의 목사 홍보에게 자초지경을 이야기하고 홍보가 조정에 알려 군사를 동원받아 목사가 군사로 이인거와 세 아들을 잡아들이고, 이들은 한성으로 압송된 뒤 참수당한다. 봉림대군은 이때 난을 진압한 공으로 특별히 1등공신으로서 책록된다.

 

병자호란

1636년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숭덕문황제, 1592~1643, 후금의 칸 재위1626~1636, 청나라황제 재위1636~1643)가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오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되면서, 강화도에 왕족들과함께 정부를 옮겨 장기항전을 불사하지만 인조가 강화에 들어가기 전에 머물던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어버리면서, 50여일간 후금군으로부터 농성하다 결국 정축하성(인조가 59일간의 농성을 끝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을 하게되면서 역사책에서도 언급되는 삼전도의 굴욕[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삼배구고두례(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려라)를 당한다].

이 사건이후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를 포함한 홍익한(1586~1637), 윤집(1606~1637), 오달제(1609~1637)등과 함께 청나라 선양에 볼모로 잡혀가게 된다. 

 

이때부터가 시작이네..

형 소현세자는 인질기간8년중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로부터 서구의 문물과 지식을 전수받고있었고,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해 속으로 언젠간 꼭 청나라를 정벌해버리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소현세자가 봉림대군보다 일찍 조선으로 돌아와 이런 경험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아버지 인조에게 윤허를 청하지만, 보수적이고 더욱이 삼전도의 굴욕으로인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던 인조는 세자의 개혁자체를 반대하고 나서게 되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는데, 1645년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 개혁또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봉림대군이 조선으로 돌아와 형의 빈자리를 아버지가 채우게끔 하려는데, 이미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3명이나 있어서 대신들은 이들이 우선순위로 세자 책봉을 받아야한다고 주청하지만, 인조의 국유장군론(어린 적장자보다 나이가 있고 기반이 다져져있는 왕자가 왕이 되어야 나라가 안정된다)논리를 들고 내세우면서까지 강행하려하자 1645년 9월에 세자에 책봉된다. 

 

즉위

1649년 아버지 인조가 아들인 이연(18대 현종, 1641~1674, 재위1659~1674)을 왕세손으로 책봉한지 얼마안있다 서거하게되면서 아버지를 이어 17대 효종(1619~1659, 재위1649~1659)으로 즉위하게 된다. 어릴때 아우 인평대군과 본인을 가르치던 송시열(1607~1689)과 송준길(1606~1672)등을 조정으로 발탁했고,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서인, 남인에 골고루 균형맞춘 등용으로 인해 즉위초기 혼란을 잘 막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이후 여러 중론을 모아 대동법(각 지방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대신 쌀, 직물, 돈으로써 세금을 납부하려는 재정 제도)을 실시하게끔 하여 균형이 잘 맞지않던 세금납부체제를 고쳐서 균형있게 골고루 맞춰주니 이때 백성들이 효종을 칭송했다고 한다.

 

북벌

효종하면 딱 나오는 단어인 북벌정책이 즉위초 안정을 이뤄낸 이후 슬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효종은 즉위초 정권을 잡던 친청파를 몰아내고 강경파를 중용해 추진하게 된다. 마침 홍타이지 황제 사후 섭정을 맡던 예친왕 도르곤(1612~1651)이 서거하게 되면서 이때다 싶어 북벌정책이 활기를 더 펴게 된다. 이때 친청파 대신의 핵심 김자점등을 숙청하면서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군비강화를 필두로해서 무신들을 뽑아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기고 1652년 어영청(선봉부대)을 개편하여 예산을 쏟아붓고 현재의 특수부대를 조직하는 것처럼 군사를 양성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학교다닐때 나오던 하멜 표류기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을 통해 조총을 개량한 총 개발등의 무기생산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갑작스런 죽음

이 모든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을 때,  1659년 갑자기 효종이 정사를 못볼만큼 몸이 안좋아져 침을 맞게되는데 어의 신가귀(?~1659, 현종때 처형)의 진료를 받던중 침을 잘못놓는 실수를 하게되면서 출혈이 걷잡을 수 없이 나게 되면서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로 서거를 해버리는데.. 아마 갑자기 이런 주제가 나와서 놀랬거나 이미 예상했던 분들도 있겠지만 그만큼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모든 북벌정책이 취소가 되어버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묘호는 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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