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조선의 군주

10대 연산군

Mintaka5 2024. 7. 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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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sangun, 1476~1506, 재위1494~1506

 

 

출생

1476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에서 아버지 성종 이혈(1457~1494, 재위1469~1494)과 어머니 폐비 윤씨(1455~1482, 1479년 폐위)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이융.

 

배경

성종의 장자로서 7살이되던 1483년 세자에 책봉되고 군주가 되기위한 기초교육을 받기 시작하는데, 배움에 별로 관심이 없던 연산군이라 되려 왜 이런걸 해야하느냐 라고 따지고, 성격도 난폭해서 어릴적부터 신하들이 매우 대하기 힘든 세자로서 성장하게 된다.

 

즉위

아버지 성종이 1494년 서거하면서 연산군이 조선 10대 국왕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처음부터 난폭하게 굴었던 건 아니고 즉위 초반기에는 나름 살기 어려운 백성들의 생활에 신경도 많이쓰고 국방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국방쪽은 비융사(1500년 설치된 기관이며 비변사의 전신인 기관. 병사 방어용 갑옷, 투구등의 방어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기관)라는 기관을 설치해 병사들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이전보다 성능이 좋은 병장기등을 제작해 당시 바다건너 왜의 약탈과 북쪽의 야인들의 침입을 대비하게 된다. 

백성들의 생활은 사창제(문종때 처음 실시되나, 혼돈의 세월을거쳐 성종때 다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설치함. 굶어죽으면 안되니)를 실시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 고려의 의창, 상평창제도를 거치며 발전된 형태이다.

여튼 연산군 즉위 초반엔 이렇게 나름 업적이 많은 편이였다.

 

무오사화

즉위후 여느 국왕이 했던 것 처럼 아버지에대한 실록을 편찬하라고 아래에 명하는데, 1498년 이극돈과 유자광의 참소(남의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 고하는 것)가 있었는데, 내용은 실록편찬 사초(역사서 편찬 자료)중에 사림의 대표자격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계유정난(1453년, 수양대군의 정권탈취)을 비난했다는 것. 

그리하여 연산군시대의 여당이던 훈구파에서는 이참에 야당격인 사림파를 모두 쓸어버릴계획을 짜는데..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등의 거물급 인사들은 선왕을 욕했다는 죄목을 씌워 처형해버리고 그 아래의 사림세력들은 유배, 좌천, 파직을 당하게 되며 훈구는 견제세력이 사라진다(사실상 훈구1당체제가 된).

거기다가 연산군이 사림을 더욱 가만두지 않았던 건, 폐비 윤씨 복권을 하고자 할 때 사림이 성종이 했던 유언(위에 있음)을 내세우며 어머니의 복권을 반대하면서 더욱 연산군에게 미움을 사게 되면서 사림 정치인의 직언, 경연, 정부부처 자체를 축소시킨다(언론쪽 혁파).

 

이것들이 선 넘었네..? 다 뒤져라

연산군의 명성이 드러나게 되는 사건이 바로 갑자사화(1504)이다. 이 사건의 배경으로,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가 어떻게 사사되었는지 이유를 모른채로 컸고, 아버지 성종은 붕어하기전 자신이 죽고 백년간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는 꺼내지도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었는데, 그래서 연산군은 계모인 정현왕후(중종의 어머니, 1462~1530)를 어머니로 알고 지내다가, 1504년 성종 서거후 행장을 쓸 때 폐비 윤씨 사건을 알게되면서 기회를 잡았다 싶은 연산군이 이기회에 왕권도 강화시키고 어머니의 복수를 하면 어떨까 해서 시작된 사건이다(훈구가 1당체제로서 힘이 막강해지니 누르고, 절대왕권을 확립해보는 차원의 느낌).

어머니 폐비윤씨가 폐위되고 성종의 왕비가 된 자순대비 윤씨(정현왕후, 1462~1530)의 처소앞에 칼들고 나오라고 협박하는데 이때 모두가 공포에 질린 상황에서 연산군의 왕비 신씨(폐비 신씨, 1476~1537)가 연산군을 뜯어말리면서 돌아가게 되지만, 이번엔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1437~1504) 처소에 들어오는데.. 병중으로 누워있던 인수대비앞에 이항(1474~1533)과 봉안군 이봉(연산군 이복동생, 1482~1505)의 머리채를 잡고 할머니의 침실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폐비윤씨를 왜 죽였냐 따지며 거의 반 협박. 이후 인수대비는 화병으로 사망.

사화는 처음에는 복수도 하고 왕권도 강화시키게끔 해서 정리가 될려나 싶다가 이후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는 신하까지 처형하고 어머니 윤씨 폐위때 거들었던 신하들은 물론 이미 죽은 신하들까지 부관참시(대표적으로 한명회)하고 그 가족들까지 모두 처벌한다. 게다가 스승까지 죽임.. 4달간의 피비린내나는 사화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유배당하고 처벌당한다.

 

니도 나 좋제?

연산군은 색정증(다른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망상증)이 있었는데.. 태생적으로(아버지 성종도 여력이 어마무시했음)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질에 어린시절 어머니라는 여성을 잃으면서 생긴 의존증이 합쳐져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게다가 신하의 부인들까지 겁탈하는등..  마음에 드는 여성만 있다면 낮밤 가리지 않고 술과함께 범했다고 한다(일단 연산군은 다 갖춤..3가지 술, 돈, 여자).

 

장녹수

노비신분에서 연산군의 후궁이 된 장녹수는 원래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1466~1526)의 노비로 살면서 기생이 되었는데,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연산군의 눈에 들게되어 내명부 숙원(종4품)에 책봉되며 기세등등해지고, 어머니 없이 자랐던 연산군의 마음을 교묘히 이용해서 사실상 연산군을 부린다. 어머니가 없는 컴플렉스 때문이였을까, 연산군은 장녹수에게서 어머니같은 모습을 느끼며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얼마나 권세가 대단했던지,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 이병정이 길을지나다가 왠 노비가 고위작인 자신을 보고도 인사안했다는 이유로 꾸짖었는데, 도리어 그 노비는 신경끄라며(싸가지가 읍네..) 엄포를 내놓으며 모욕을 당해 보고를 하지만, 오히려 자기자신이 화를 입어(무려 장녹수의 노비이니..연산군 찬스)뇌물을 장녹수에게 바치며 화를 면하게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장녹수도 역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건 분명..

 

폭군의 최후

1506년 성희안, 박원종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이 연산군의 도를 넘는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사병들을 끌어모아 연산군 측근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하고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중종반정(1506)이다.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중종, 1488~1544, 재위1506~1544)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숨어있던 연산군을 체포해 압송해와서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보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병을 얻었는데 지금까지도 사사되었는지 열병으로 죽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여튼 1506년 연산군 사망.

연산군은 조선건국이래 첫 폐위된 왕으로서 묘호가 없다. 그래서 즉위전의 작위를 그대로 쓰고, 실록(ex, 중종실록)에 올라가지 않고 연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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