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가/네덜란드

빈센트 반 고흐

Mintaka5 2024. 7. 19.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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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고흐 자화상,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53년 네덜란드 남부 쥔더르트(Zundert)에서 목사인 아버지 테오도르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와 어머니 안나 코넬리아 카벤투스 반 고흐(Anna Cornelia Carbentus, 1819~1907)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다. 그의 위로 한명더 있었으나 사산아였기에 사실상 빈센트가 장남이였다.

 

배경

고흐 가문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 이미 16세기부터 위그노 성직자, 미술품 거래등으로 가문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빈센트의 아버지10형제중 3명은 미술상, 할아버지는 라이덴 대학교 신학 전공생이자 미술상으로서 강의를 이어나갈정도로 가문의 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교육, 자퇴, 자퇴

고흐는 1861년 8살에 고향 준데르트 초등과정으로 입학하지만 몇달만에 퇴학당하고 부모는 가정교사를 붙여 빈센트와 여동생 안에게 수업을 듣게하는데 마침 가정교사는 그림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가 빈센트의 그림인생 시작인 시점이 되었다. 1866년 빌럼2세 중학교에 들어가서 지도스승인 콘스탄트 코넬리스 휘스만(Constant Cornelis Huijsman, 1810~1886)을 만나게 되며 그림지도를 받지만 이곳도 자퇴한다. 이는 아무래도 규칙적이고, 냉정한 학교생활과는 맞지않던 고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는듯 하다.

그렇게 자퇴 이후 1869년에 미술상이였던 삼촌이 파리 미술상 아돌프 구필(Adolphe Goupil, 1806~1893)과 설립한 갤러리 구필컴퍼니(Goupil & Cie, 1850)에 인턴으로 입사하게 되며 그는 작품을 그리며 견습훈련을 받게 된다.

 

정직원 채용

그렇게 견습훈련이 끝난 고흐는 구필컴퍼니에 정식직원으로 채용되면서 사장님인 삼촌에 의해 구필컴퍼니 런던지부로 발령을 받게 되는데, 그는 이때가 빈센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가족들이 얘기하는데 그 이유는 돈도 많이 벌고 사랑에도 빠지는등의 이유로 이때가 고흐의 인생 중 좋은 시기이였지만 고흐는 미술품들이 상품으로 취급되는 장면을 보고 열받아 컴퍼니에 지장이가는 행위들을 하게되면서 1876년 해고당하게 된다.

 

다양한 직업

해고당하고 난 이후 4월, 고흐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한 기숙학교내에서 무급교사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적응을 하지못해서 나오게 되고 이번엔 선교단체로 시선을 돌려 그곳의 목사 조수로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이곳도 적응이안되서 뛰쳐나온다. 선교단체에서 뛰쳐나오고 난 뒤엔 네덜란드 도르드레흐트 서점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그나마 여유시간이 많이 남아서 서점 뒷방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성경구절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등으로 번역을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행위는 빈센트가 목사가 되려는 욕망이 어느정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신학생 되기 실패

결국 돌고돌아 1877년 신학자인 삼촌 요하네스 스트리커(Johannes Stricker, 1816~1886)에게 신학을 배우게 되지만 1878년 신학학교 입학시험에 낙제하고, 낙제후에 개신교학교에서 3개월 수업을 듣고 친 시험에서 또 낙제하고 만다.

 

길거리생활과 집탈출

여러번의 실패를 번복하던 고흐는 농부, 광부들과 같이 생활하며 어려움을 공유하고, 같이 자고, 같이 일하고, 이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며 보람까지 느끼지만 불법적인 선교행위라고 고발한 사람들에 의해 모든것을 잃고 다시 부모님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자포자기한 고흐는 놀고 먹기만하면서 부모님과 미래에 대한 논쟁으로 인한 갈등이 발생하며 벽이 생겨버리는데, 특히 아버지와 심각하게 갈등을 이어가다 하도안되서 아버지가 고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바로 집에서 도망쳐나와 벨기에로 도망쳐서 광부들과 함께 머물게 된다.

 

예술가로서 자유롭게

집을 탈출하고 난 뒤인 1880년, 고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예술가로서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부터 조금씩 안정을 찾게되는데, 첫 시작은 안톤 밴 라파드(Anthon van Rappard, 1858~1892)의 화방에서 일할기회를 가지면서 경력이 시작된다. 이 기간때 빈센트는 매춘부였던 시엔 호르닉(Sien Hoornik, 1850~1904)을 만나면서 아이도 둘 낳게 된다. 우리가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면 바로 유화작품을 떠올리게 되는데, 1882년부터 빈센트가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며 자신이 잘 아는 화가들과 예술적 공감을 하며 지내기 시작하는데, 이때 친하게지내던 화가들은 아래 표와 같다.

  이름
빈센트와 교류한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

고흐는 이때부터 도덕적 관습을 깨고자 하는 열망과 자신은 일반적인 삶을 살 수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많은 책을 읽으며 배경을 키우면서 예술가로서 가져야할 패시브 기술들을 익혀나가는데, 이때 연인 시엔 호르닉과 관계가 끝나버린다.

시엔 호르닉과의 관계가 끝나버리고 고흐는 이후에 마음을 달랠 수단으로 홀로 그림그리는 거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에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 미친듯이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참 인연이란 알 수 없는게, 고흐는 또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1884년 그의 이웃이였던 마고 베게만(Margot Begemann, 1841~1907)과 교제하면서 결혼까지 약속하게되지만 가족들의 강한 반대에 부딫히면서 또 1885년 헤어지고 만다. 고흐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당해에 사망함으로서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의 작업실에서 완전히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흑화하다

1885년 이후의 고흐는 어두운 분위기의 사실주의적 폭로를 담은 그림기술에서 색채를 다채롭게하여 힘을 빼 좀더 그림의 선이 날카로워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는 기술로서 작품을 그리게 된다. 1886년 파리에 돌아와서 살롱, 아카데미등에 참여하며 당시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며 빈센트 자신도 인상주의 풍으로 바뀌게 되는 시점이 되면서 그들과 교류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과로로인한 피로와 이미 앓고있던 정신질환이 겹치면서 1888년 파리를 떠나고 아를(Arles)의 한 노란집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곳 아를(Arles)에서는 주로 풍경, 농부들의 수확장면, 초상화등을 그리면서 보내는데, 친한동료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말다툼을 벌이면서 격렬하게 논쟁을 하다 고갱이 돌아간후 왼쪽귀를 잘라버리는 귀행을 저지르는데, 이 귀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우리에게도 유명한 작품인 왼쪽귀를 자른 자화상(Autoportrait à l'oreille bandée, 1889)이다. 아래에 나오는 그림이 해당 작품이다.

왼쪽귀를 자른 자화상, 출처-위키피디아

오베르-쉬흐-와즈에서의 말년

고흐는 1890년 중반 파리 북서쪽 오베르쉬흐와즈(Auvers-sur-Oise)로 정착하게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는 이미 인상파화가들이 많이 포진해있었는데, 참으로 놀랍게도 이곳에 말년을 책임져주는 의사이자 그림수집가, 예술후원자인 폴 가셰 박사(Paul Gachet, 1828~1909)를 만나게 되면서 다른 인상주의화가들과의 연결점이 만들어진다. 우습게도 이들은 모두 폴 가셰 박사의 환자들로서 거물급 인상주의 화가들이다. 폴 가셰 박사의 환자들은 아래 표에 명시되어 있다.

  생몰년도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 ~ 1903
폴 세잔(Paul Cézanne) 1839 ~ 1906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 ~ 1919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 ~ 1883

이미 예술적 감각이 절정에 달했던 고흐는 폴 가셰 박사의 보살핌덕분에 이곳에서 죽기전까지 3달의 시간동안 74점의 그림과 45점의 드로잉을 그리기에 이른다. 당해인 1890년 8월이 되기 직전, 빈센트의 정신불안 증세가 다시 나타나면서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지막 작품인 나무뿌리(Racines d'arbres, 1890)을 그리자마자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하게 되는데 1890년 7월29일이였다.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 완성한 마지막작품 '나무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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