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Mérovingienne, 메로빙거 왕조

클로비스1세

Mintaka5 2024. 7. 1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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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vis I, 466~511, 살리프랑크재위481~509, 프랑크재위509~511

세례받는 클로비스1세, 출처- 위키피디아

출생

466년 벨기에지방 투르네(Tournai)에서 아버지 킬데리크1세(Childéric Ier, 436~481, 재위457~481)와 어머니 바시나 드 튀링겐(Basine de Thuringe, 438~477)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클로비스 출생 야사

아버지 킬데리크가 457년, 신하들의 아내를 겁탈했다가 백성들의 분노를 사서 퇴위당하고 갈리아 민병대장 아에기디우스(Aegidius, ?~464, 재위457~464)를 군주로 옹립된다. 이때 킬데리크는 튀링겐으로 도망치면서 그때 아내 바시네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프랑크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왕이 되어달라는 청을 받아들여 바시네와 함께 귀국하면서 그 사이에 클로비스1세가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전해지는 이야기이고 확실한 신빙성은 없다.

 

당시 배경

클로비스가 어린시절일 때, 아버지는 살리프랑크 왕이자, 서로마제국의 장군직책도 겸하고 있었는데 476년 서로마제국이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킬데리크는 오도아케르 세력과 규합하지 않으면서 기싸움을 하고있었는데, 두 국가(서고트왕국,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와 경계를 하는 입장에서 쉽사리 공격할 수 없는 입장이라 주로 방어위주의 전략을 사용하였다.

당시 살리프랑크족은 부르고뉴, 동고트, 반달족등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니케아 기독교(325년 제1차 니케아 공회의에서 작성되고,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완성된 니케아 신조를 고수하는 기독교 교리)와 아리우스 기독교(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관구의 사제인 아리우스가 주장한 기독교 신학)로 나뉘며 논쟁에 오랜기간 휩싸이는데, 선출된 군주들은 둘중 하나를 채택해서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형태를 고수했다고 한다.

 

교육

클로비스가 6~7살이 된 무렵 아버지 킬데리크가 교육을 도맡는데, 당시엔 15살이 되기전까지는 전투에 직접 참여가 불가능해서 그 전까지 전쟁에 필요한 무예, 승마, 사냥등의 전투교육을 받고(군인왕이 되기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보면됨)라틴어를 배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배웠을거라는 학자들의 의견도 존재함.

 

즉위

481년 킬데리크1세가 서거하면서, 아들 클로비스가 클로비스1세(Clovis Ier, 466~511, 살리프랑크재위481~509, 프랑크재위509~511)가 즉위하게 되는데,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왕국을 물려받는데, 주된 정책은 영토확장.

클로비스는 즉위이후 조금씩 현재 프랑스 북부에 해당하는 영토 전체를 정복하게 되는데, 영토확장과정에서 캉브레의 프랑크족과 라인강유역의 프랑크족과 동맹을 맺기도 하고, 동맹을 거부하는 세력들은 자비없이 누르는 모습의 형태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493년에는 라인프랑크 왕국의 공주 클로틸데(Clotilde, 474~545)와 결혼하게 되면서 이미 카톨릭을 믿고있던 아내의 영향을 많이 받게된다.

 

서고트왕국 원정

즉위 후 10년정도 지났을 때, 매제[테오도리크 대왕은 클로비스의 여동생 오도플레드(Audoflède, 470~534)와 결혼함]이자 동고트왕국 테오도리크 대왕(Théodoric le Grand, 455~526, 재위493~526)과 동맹을 맺게 되면서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정복전쟁을 더벌리게 되는데, 프랑크 중부지역이 동맹으로인해 안정이 되면서 파리남부부터 현재 스페인 영토까지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던 서고트왕국을 치면서 남쪽영토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물론 무작정 쳐서 영토를 쟁취하는 방법보다도 공격하면서 동맹을 제안하는 전술을 취함으로서, 지나가는 길에 방해세력을 유화시킨다. 이 작전이 효과가 있었는데, 496년부터 더욱 많은 군대를 동원한 서고트왕국 원정을 시도하는데, 당시 서고트왕국의 수도인 툴루즈(Toulouse, 507년까지)에 알라리크2세(Alaric II, 460~507, 재위484~507)를 사로잡는 목표를 가지고 공격하게 된다. 서고트 장군 수아트리우스(Suatrius, ?~?)는 클로비스의 군대를 맞아 최선을 다해 막지만, 결국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이후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499년엔 부르고뉴와 동맹을 맺고, 아들 티에리를 부르고뉴 왕 지기스문트(Sigismond, 475~524, 재위516~523)의 딸 수아베고트(Suavegothe, 490~550)와 결혼시키면서 동맹을 혈맹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에 이름.

507년 클로비스의 군대는 남쪽으로 쭉쭉 내려가는데, 이때 서고트 왕 알라리크2세(Alaric II, 460~507, 재위484~507)의 군대와 맡붙게 되는데 부이예 전투(La bataille de Vouillé, 507)에서 알라리크2세가 전사하면서 서고트군대가 흩어지면서 클로비스의 승리로 마무리지어지는데, 이 승리로 더 밀어붙이면서 피레네산맥 근처까지 영토를 합병시킨다.

 

세례

508년 크리스마스에 클로비스1세는 3000여명의 전사들과 함께 랭스(Reims)주교의 레미기우스(Remigius, 437~533)로 부터세례를 받게되는데, 세례를 받은 장소 랭스는 이후 프랑스의 군주들이 대관식을 했던 장소가 된다. 

이 대사건으로 프랑크의 군주와 성직자간의 교류가 시작되는데, 프랑스의 군주에서 다루는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군주의 곁에는 총리대신격 추기경들이 항상 함께하는 글이 보일것이다. 클로비스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세례로 인해 교회의 지원과 왕좌의 권위를 지속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격이 되면서 왕권이 점점 안정이된다. 

 

서거

511년 파리에서 서거.

사실상 클로비스1세부터 프랑크 메로빙거 왕조(Mérovingiens, 481~751)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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