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제3공화국(1870~1940)

레몽 푸앵카레

Mintaka5 2025. 1. 23. 14:12
반응형

레몽 니콜라 랑드히 푸앵카레,

Raymond Nicolas Landry Poincaré, 1860~1934, 재임1913~1920

레몽 푸앵카레,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60년 프랑스 제2제정 뫼즈주 주도 바ㅎ를뒥(Bar-le-Duc)에서 아버지 니콜라 앙토니 푸앵카레(Nicolas Antoni Poincaré, 1825~1911)와 어머니 나닌 마리 피카티에(Nanine Marie Ficatier, 1838~1913)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 9대 대통령. 법률을 전공하여 변호사로 활동하고 1887년 27세의 나이로 고향인 뫼즈 최연소 하원의원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이후 1895년 변호사 사무실 개업후 고위층 의뢰인들과 교류하면서 성공을 거두고 3회에 걸친 총리 역임과 대통령에까지 오른다. 1차세계대전(1914~1918)당시 국가원수로서 유럽국가들간 충돌이 격화되던 시기에 반독일사상을 기반으로 한 외교책을 펼쳐 러시아 제국간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등 삼국 협상을 굳건히 하여 독일 제국과 맞서 싸운다. 

1920년 대통령임기가 종료됨에따라 물러난 뒤 다시 총리로 취임하고 계속 유지시킨 반독정서로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물게된 전쟁배상금 1320억 마르크를 제때 지불하지 못하게 되면서 독일을 압박하는등 초강수를 일으키지만 다른국가간의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게 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이후  한번 더 총리에오르지만 1929년 정계를 은퇴한다. 

 

초년

공학자 아버지 밑에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다. 과학자이자 수학자로 유명한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 1854~1912)와 사촌지간(아버지 안토니 푸앵카레의 동생 레온의 아들이 앙리 푸앵카레)이다. 1870년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패배한 이후 부모의 저택이징발되는등 불이익을 겪게되면서 이때부터 프로이센(독일)에 대한 반발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자기 개의이름을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라고 지었을 정도. 이후 파리대학교에 입학해 법학을전공하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된다.

 

정계

 1880년대에 들어서 마누엘 푸흐꺄드(Jacques Manuel Fourcade, 1862~1943)과 함께 당시 유명 변호사인 앙리 뒤 뷔(Henri du Buit, 1837~1919)의 비서가 되면서 일을 시작한다. 거기에 1883년 변호사협의회 개막식에서 1881년 사망한 쥘 뒤포르(Jules Armand Dufaure, 1798~1881)를 기리는 연설을 하게 되면서 눈에 띄게 되면서 쥘 드벨(Jules Develle, 1845~1919)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886년 쥘 드벨이 농무부 장관직을 맡게 되면서 푸앵카레 역시 같이 들어가 쥘 드벨의 비서실장을 18개월간 맡게 된다. 비서실장직을 끝내고 1887년 고향인 뫼즈의 하원의원으로 27세의 나이로 선출된다. 

이후 1895년 푸앵카레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는데 꽤 높은직의 의뢰인들이 드나들면서 수익상으로는 성공을 거둔다. 당시 파리언론조합의 변호사로 언론, 제조, 금융등 회사문제를 변호하는 담당일을 맡는다. 

 

대통령

1912년 프랑스 3공화국 8대 대통령 아르망 팔리에르(Armand Fallières, 1841~1931, 재임1906~1913)의 내각 총리로서 취임하고 1년이 지난 1913년 9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푸앵카레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1년이 되던 1914년에 유럽을 뒤흔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게 된다. 이미 1차대전 이전부터 유럽열강들 사이에 충돌이 격화되던 시기에 푸앵카레는 이미 가지고있던 반독일 사상을 바탕으로 외교전을 펼치는데 마침 1차대전을 독일제국이 일으키게 되면서 항전의지를 가짐으로 맞서 싸운다. 

1차대전 기간동안 군대와 난민들을 독려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지역에 여러차례 방문하는등 노력을 기울이는데, 당시 프랑스 군 원수로서 군을 지휘하던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의 활약으로 독일제국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최대한 빨리 종전협정을 맺기위해 몰아붙이고, 1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대통령임기 이후

1920년 대통령임기 종료 이후 다시 1922~1924년과 1926~1929년 두차례에 걸쳐 내각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푸앵카레 총리는 1차대전이후 독일에 강하게 압박하기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독일변경 지역을 점령하는등 연합국으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1924년 총리를 사임하게 되고, 1929년엔 재정긴축정책등을 시행하지만 효과는 커녕 프랑스 프랑의 평가절하가 나타나는등 온갖 욕을 먹다가 1929년 고령(69세)으로 인하여 다시 사임하고 사실상 정계은퇴를 한다.

이후 1934년 폐색전증으로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반응형

'프랑스 대통령 > 제3공화국(1870~194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돌프 티에르  (0) 2025.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