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조제프 루이 아돌프 티에르, Marie Joseph Louis Adolphe Thiers, 1797~1877, 재임1871~1873
출생
1797년 프랑스 부슈이 뒤 혼느주(Bouches-du-Rhone)마르세유(Marseille)에서 아버지 피에르-루이 티에르(Pierre-Louis Thiers, 1759~1843)와 어머니 마리-마들렌느 아믹(Marie-Madeleine Amic, 1774~1852)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프랑스3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프랑스 공화국 제2대 대통령. 말년의 부르봉 왕조의 대신으로서 부르봉 왕조 마지막 군주 루이 필리프1세(Louis Philippe Ier, 1773~1850, 재위1836~1848)의 밑에서 외교대신으로서 직무를 맡지만 의견차로 인하여 멀어지고 점차 앙시엥레짐(프랑스 대혁명 기점)이전으로 돌아갈려는 모습에 왕정 총리대신등에 비판을 가하고, 1848년 2월혁명으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의 제2공화국을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 역시 1851년 12월 쿠데타로 프랑스 제2제정이 열림에 따라 아돌프 티에르는 제정에 협조하지 않고 타협하지도 않겠다는 의사를 펼치고 행동한다. 이후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독일제국에 의해 패배하고 나폴레옹3세(Napoléon III, 1808~1873, 대통령재임1848~1852, 황제재위1852~1870)가 폐위됨에 따라 제3공화국 행정수반이 되고 1871년 제3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시기에 왕당파와 결별하여 불신임안에 의해 의회에서 가결됨에 따라 1873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아돌프 티에르 이후로 사실상 프랑스의 군주는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게 된다.
초기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생활을 하지만 원래 관심사인 문학, 역사, 언론쪽에 관심이 더 많이있던 아돌프 티에르는 일찍이 1821년 24세에 수도 파리로 상경해 기자로 활동하면서 당시 프랑스대혁명이후 지속적으로 번져오던 자유주의에 합승하게 되면서 당시 앙시엥레짐으로 돌아가고싶어하던 루이18세(Louis XVIII, 1755~1824, 재위1814~1815, 1815~1824)와 루이18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미래의 샤를10세, 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을 비판하는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1830년 7월
샤를10세가 재위한지 6년만인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전역에 뿌리내려진 자유주의는 식을 기세가 보이지않았고 나폴레옹1세(Napolé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의 몰락이후 왕정복고로 재위에 오른 루이18세와 샤를10세는 프랑스를 앙시엥레짐(프랑스 대혁명 기점)이전의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려는 태세를 보임에 따라 의회를 해산하고 자유를 억압함에 따라 시민계층에서부터 눌러왔던 반발이 1830년 7월에 터진 것.
그렇게 봉기를 일으켜 샤를10세를 폐위, 국외로 추방하고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리프를 루이 필리프1세(Louis Philippe Ier, 1773~1850, 재위1836~1848)를 추대해 다시금 왕정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아돌프 티에르는 루이 필리프1세의 정부에서 재무부 차관, 내무장관, 총리대신등으로 활약하며 왕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지만 점차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가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묵살하고 점점 샤를10세의 행보를 띄어가고 게다가 1846~1848년의 경제위기, 노동자계층의 불만이 쌓이면서 1848년 2월 혁명의 불씨가 붙기 시작한다.
1848년 2월 이후
그렇게 1848년 2월 다시 혁명이 일어나면서 루이 필리프1세가 폐위되고 부르봉-오를레앙 왕조가 붕괴되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미래의 나폴레옹3세)의 제2공화국이 들어서게 되면서 티에르는 제2공화국을 지지하고 공화국 의회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활동을 전개하지만, 1851년 12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킴에 따라 티에르역시 체포되어 해외로 추방당한다.
이후 1852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3세로서 황제가 되면서 나폴레옹 황제는 티에르에게 자신의 정부 보좌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지만 티에르는 이를 거절하고 관심사였던 역사서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보불전쟁 이후
1870년 7월, 프로이센과 프랑스 제2제정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프로이센의 군주이자 북독일연방의 수장 빌헬름1세(Wilhelm Ier, 1797~1888, 재위1861~1888)와의 관계가 나빠지고 프랑스 내 프로이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됨에 따라 나폴레옹3세의 측근들이 나폴레옹을 부추겨 전쟁을 시작하게 되고 보불전쟁이라고도 하는 이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제2제정 황제 나폴레옹3세가 1870년 9월 폐위되고, 제3공화국이 선포되기에 이른다.
새로운 제3공화국의 행정수반으로서 아돌프 티에르가 선출되어 정부를 이끌게 되지만, 왕당파가 대다수였던 당시 의회와 뜻이 맞지 않았는데 보불전쟁의 굴욕적인 종전 조건*과 프로이센 군이 파리 시내에 개선행진을 하면서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티에르 정부에 반발하게 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50억마르크 전쟁배상금, 배상금 납부가 완료될 때 까지 프로이센군이 프랑스에 주둔한다, 알자스-로렌지방을 프로이센에 함양한다, 알자스-로렌지방의 주민들은 1872년 10월1일 이전까지 프랑스 또는 프로이센중 국적을 선택해야한다.
충돌
1871년 5월10일 보불전쟁으로 인한 프로이센과의 최종 조약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체결하게 되는데, 이후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방위대와 정부군과의 마찰이 발생하게 되는데, 사실상 정부군이 밀려 퇴각하고 파리시민과 노동자들의 주도로 자치정부 파리코뮌이 설립되게 된다. 그렇게 티에르는 다시 군대를 집결시켜 파리를 탈환하고자 전력을 보충하고 1871년 5월 21~28일까지 무력충돌로 인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민가를 불태우는등의 강경진압으로 파리코뮌이 진압되지만 수만명의 사망자, 포로가 발생해버린다.
대통령
1871년 8월 31일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2년간(1871~1873)의 짧은 임기동안 공채를 발행해 보불전쟁 전쟁배상금 50억마르크를 2년도 안되는 시간에 모두 지불함으로서 프로이센군을 프랑스에서 퇴각시키게끔 만들긴 한다. 그러나 전쟁패배로 인한 정비차원에서 징병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보이게 되면서 다시 시민, 노동자 계층의 반발을 불러옴에도 모자라 의회 내 공화파들간에도 파리코뮌 강경진압의 원한이 남아 티에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는데, 티에르는 의회를 압박하기위한 최종수단 사직서를 의회에 제출하면서 강수를 두고자 하지만 의회가 이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어이없게도 1873년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이후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877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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