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 Myeong-gil, 1586~1647
영의정 재임기간 | 군주 | |
108대 영의정 | 1638.10 ~ 1640.02 | 인조15년~인조17년 |
111대 영의정 | 1642.08 ~ 1642.12 | 인조19년 |
출생
1586년 아버지 영흥대도호부사 최기남(1559~1619)과 어머니 전주 류씨(병조참판 류영립1537~1599의 딸, 1556~1615)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광해군을 몰아낸 주역이며 인조의 최측근이자, 정묘호란, 병자호란등을 같이 겪는 주화파(친청파:청나라와 화친하자)대표 인물.
초년
이항복(1561~1618)의 제자였고 성리학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특히 명필로서 이름이 나있었다. 1605년 생원시에서 장원, 진사시에서 8위로 급제. 당해에 증광시(식년시에 준하는시험)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관직생활 시작.
연이은 재난
1608년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즉위하게 되면서 대북이 집권세력이되면서 서인계열이였던 최명길역시 피곤한 관직생활이 이어지다가 1614년 병조좌랑에 재직하고 있을 때 공무집행 도중 사소한 일로 인해 광해군의 미움을 사 삭탈관직당하고 아버지 최기남과 같이 궁에서 쫓겨나 가평 대성리로가서 지내게 되지만, 1616년 모친 류씨가 사망하면서3년상을 치르는데 거의 3년상이 끝나자마자인 1619년엔 부친 최기남이 사망하면서 또 3년상을 치르면서 6년간 상복을 입게되는데, 이때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1616~1622년까지 상을치른셈.
인조반정
1623년 3월 이귀, 김류, 구굉, 신경진등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추대해 올리는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최명길은 형제들(형 최내길1583~1649, 둘째동생 최혜길1591~1662, 셋째동생 최만길1596~?)과 함께 가담하면서 궁에서 연회중이던 광해군을 습격하는데 광해군은 습격당하기 전까지도 사태파악이 안될만큼 정보가 없었다.
능양군은 1618년 폐비가 된 인목대비를 직접 찾아가 보새(국가를 상징하는인장)를 바치게 되면서 대비가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키게 된다. 이가 16대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
최명길은 인조 즉위이후 정사공신1등(반정공신)으로서 빠르게 승진하게 된다.
이괄의 난
1624년 인조반정(1623)에 참여했던 이괄(1587~1624)이 자신이 왜 2등공신에 책록되었는가에 불만을 품어 난을일으킨다. 무신으로서 북쪽의 후금을 경계하기위해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해있다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내부에서도 서열에 밀린 이괄을 제거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1624년 군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해온다.
최명길은 이괄을 설득하였지만 이괄은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진격해오는 이괄의 군대가 수도 한양 코앞까지 진격해오면서 수원으로 대피하는데, 한양이 점령당하고 나서는 천안까지 대피하게 된다. 이곳에서 다행히 이괄의 반란군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만, 남은 반란군이 경기 남부쪽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에 충청도 공주(공주시)까지 대피하게 된다.
어찌저찌 난이 마무리 되고 이괄은 살해당하고 반란 수괴들 모두가 자결하거나 처형당하는 등 마무리 되지만.. 반란군 수괴인 한명련(?~1624)의 아들 한윤, 한택 형제가 후금 누르하치(1559~1626, 건주여진추장1583~1616, 후금재위1616~1626)에게 투항하면서 상황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두 호란
I. 정묘호란
투항한 한윤과 한택이 후금에 협조하게 되면서 후금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1627년 3월 발생한 정묘호란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신분이 된 강홍립(1560~1627)이 마침 후금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한윤, 한택형제는 후금식 변발에 후금 여인들과 결혼까지 하는데, 강홍립은 변발을 거부하고, 한족 여인과 결혼(첩실) 하면서 거의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정도였음.
후금이 쳐들어오면서 침입10일만에 평양성이 떨어지면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게 된다. 이에 의병이 다시 일어나면서 후금군을 격파하면서 전선을 형성하게 되면서 안그래도 명나라와 전쟁중이던 후금입장에서 부담이 되어 후금이 4월에 강화를 제안하면서 조선도 승낙하면서 형제관계가 된다. 최명길은 3월에 후금군이 쳐들어오면서부터 홀로 강화를 주장하면서 많은 공격을 받는다.
이후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명나라가 조선에 7천의 소총수를 지원하라고 요구하는데 후금은 파병하지 말라고 하는 이중적인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II. 병자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기 전 병조판서로 재직하고 있을 때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노하여 돌아가면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자고 주장하지만, 또 홀로 주장을 하면서 배척당해버리는데, 1636년11월 청 태종 홍타이지(1592~1643, 후금재위1626~1636, 청재위1636~1643)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오는데,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 갈려고 했지만 이미 깊숙히 쳐들어온 청나라 군대에 의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40여일간의 버티는 과정에서도 주화론(현실적으로 확전이 불가능)을 펼치며 대립하게 되는데, 겨울을 더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조정을 인조에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테니 화의 교섭을 추진케끔 한다.
그렇게 해서 인조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되면서 의식으로 행했던 삼궤구고두례(3번 무릎꿇고 9번머리를 조아리라)를 행하게된다(삼전도의 굴욕).
외로운 말년
그러나 인조가 삼궤구고두례를 하게 한 장본인으로 최명길이 지목되면서 죽을때까지 시달린다. 병자호란 이후 우의정, 좌의정에 재수되면서 조선인포로 송환등을 성사시키면서 일하다가 영의정에 이른다. 그러나 인조를 굴욕케끔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이 안수그러들면서 1640년에 영의정에서도 물러나지만 1642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1645년 소현세자가 급사하면서 장례를3년상이아닌 7일장으로 탈상하는 과정에서 비판하지만 인조는 듣지 않는다.
1647년 병으로 사망할때까지 투병을 하다가 사망. 인조는 최명길이 사망하고 3일간 조회(국정회의)를 중지, 5일간 고기를먹지않는등 최명길을 위로했다고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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