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Capétiens, 카페왕조

필리프4세 미남왕

Mintaka5 2024. 9. 1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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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IV le bel, 1268~1314, 재위1285~1314

필리프4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68년 프랑스 퐁텐블로(Fontainbleau)d에서 아버지 필리프3세(Philippe III, 1245~1285, 재위1270~1285)와 어머니 이사벨 다라곤(Isabelle d'Aragon, 1247~1271)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카페왕조 말기의 프랑스 왕. 사실상 카페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권을 강화시켜 휘어잡은 마지막군주라고 봐도 무방. 삼부회 설치라는 카드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면서 왕권을 강력하게 만들었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김으로서 교황권을약화시킴과 동시에 프랑스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재정확충 과정에서 템플 기사단을 해체시켜 재산을 몰수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해결하려했고,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8세(Bonifacius PP. VIII, 1235~1303, 재위1294~1303)와의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프랑스와 교황청간의 분열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결과를 안게 된다. 

 

즉위

1285년 아버지 필리프3세(Philippe III, 1245~1285, 재위1270~1285)가 시칠리아 만종사건(Vêpres siciliennes, 1282)으로 프랑스인들이 학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라곤 십자군을 일으켜 주동자였던 페로3세(Pero III d'Aragon, 1239~1285, 재위1276~1285)를 치는데, 패배하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와중에 페르피냥에서 이질로 승하해버린다. 

아버지가 페르피냥에서 이질로 승하하면서 필리프가 필리프4세로 즉위하게된다.  

 

왕권

즉위이후 중앙집권화를 바로 추진하면서 초장에 왕권을 휘어잡겠다는 의지를 보이는데, 여러가지 측면에서 강화를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I. 삼부회

3계급(성직자, 귀족, 평민)이 참여하여 군주의 뜻을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서, 1계급인 성직자와 2계급인 귀족을 견제하고 3계급인 평민의 소리를 들어 민심까지 직접 챙긴다는 이 큰그림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고, 중대한 국사처리시 명분을 얻기위한 수단적 요소가 되었다. 

삼부회는 1302년 창설되어 이후에도 프랑스 역사속에서도 많이 보이게 된다. 300년뒤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대에 들어 1614년 삼부회가 해체되어 170년간 열리지 않는 절대왕정이 열리다가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2)대에 프랑스대혁명 몇해전인 1785년에 그 역할이 대두되면서 등장하게 된다.

II. 템플 기사단 

1307년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체포하고 고문끝에 거짓자백을 시켜 화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의 재산으로 환수하는 조치를 벌이는데, 이들은 십자군의 다른 이름을 가지는 존재들이였고 교황청소속의 군대로 교황의 군대라고 봐도 무방했는데, 필리프4세는 이때 교황과의 대립에서 이들을 해체시켜 교황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 재정적 이익을 취하는 형태로서 이 일을 벌인것 으로 되어있다.  

III. 중앙집권체제

봉건주의 시대의 군주로서, 필리프4세는 중앙집권화를 통해 봉건귀족의 권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자 봉건귀족의 통치권력을 억제시키고, 중앙정부의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법률을 정비함으로서 왕의 이름으로 정비된 통치이념을 하달하면서 프랑스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아나니 사건(교황 뺨맞은 사건)

이미 프랑스와 교황청간의 관계는 지속적인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찰나였는데, 기름을 처음으로 부은 사건이 필리프4세가 할아버지 루이9세(Louis IX, 1214~1270, 재위1226~1270)와 아버지 필리프3세(Philippe III, 1245~1285, 재위1270~1285)가 벌인 여러차례의 십자군으로 재정상태가 말이안나오던 상황이였기에 재정강화를 빌미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자 했다. 

이에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8세가 강력하게 반대함으로서 1296년 성직자와 평신도(Clericis laicos)라는 칙서를 반포해 세속 국가 군주들을 대상으로하여금 교황의 동의없이 성직자에게 절대 세금을 걷지 말라고 선포한다. 이에 당연히 빡친 필리프4세는 1301년부터 교황권과 왕권신수설의 우월성을 서로 강조하며 으르렁 거린다.

그러다가 1303년, 필리프4세가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1313)와 스키아라 콜론나(Sciarra Colonna, 1270~1329)를 아나니로 보내 그곳에서 머무르던 보니파시오8세를 체포하게끔 하여 별장에 가두고 뺨을 때리고 구타를 서슴치않는등 당대로서는 아주 큰 사건이자 보니파시오8세로서는 치욕적인 시간을 맞게 된다.

다행이도 아나니 주민들이 반발하여 들고일어나 보니파시오8세가 풀려나지만, 이 치욕으로 충격을 받은 교황은 한달동안 화병으로인해 병석에 누워있다가 선종하고 만다(1303). 

 

아비뇽 유수  

아나니 사건 이후 사실상 교황권은 바닥으로 추락하게 되며, 1303년 보니파시오8세가 선종하고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1세(Benedictus PP. XI, 재위1303~1304)가 1304년 선종하고 1305년에, 사실상 필리프4세의 압력으로 베르트랑 드 고트가 클레멘스5세(Clemens PP. V, 1264~1314, 재위1305~1314)로 선출되며 이탈리아에서 즉위식을 가지지 않고 프랑스 리옹(Lyon)에서 즉위식을 하고 교황청을 1309년 아비뇽으로 옮겨버리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아비뇽 유수이다.

다음은 아비뇽 유수 기간동안에 선출된 교황들이다.

  생몰년도 재위 본명
클레멘스5세(Clemens PP. V) 1264~1314 1305~1314 베르트랑 드 고트
Bertrand de Goth
요한22세(Loannes PP. XII) 1245~1334 1316~1334 자크 뒤에즈
Jacques Duèse
베네딕토12세(Benedictus PP. XII) 1280~1342 1334~1342 자크 푸르니
Jacques Fournier
클레멘스6세(Clemens PP. VI) 1291~1352 1342~1352 피에르 로제
Pierre Roger
인노첸시오6세(Innocentius PP. VI) 1282~1362 1352~1362 에티엔 오베르
Étienne Aubert
우르바노5세(Urbanus PP. V) 1310~1370 1362~1370 기욤 드 그리모아르
Guillaume de Grimoard
그레고리오11세(Gregorius PP. XI) 1329~1378 1371~1378 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
Pierre Roger de Beaufort

아비뇽 유수는 그레고리오11세를 마지막으로 종료된다. 그레고리오11세가 1377년 로마로 환도함으로서.   

 

네슬레 탑 사건

1314년 필리프4세가 승하하기 전 큰 사건이 터지는데, 필리프4세에게는 장남 루이(루이10세), 차남 필리프(필리프5세), 삼남 샤를(샤를4세)이 있었는데, 장남 루이의 부인과 삼남 샤를의 부인이 간통을 하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간통죄는 지금과는 상상하기 힘든 강력 범죄였는데, 간통을 했던 2명의 기사는 대역죄에 준하는 판결을 받아 산채로 사지가 절단되고 효수되는 처벌을 받고, 2명의 필리프4세의 며느리들은 삭발당한채 네슬레 탑에 유폐되는데 이 탑의 이름을 따서 네슬레 탑 사건이라고 한다. 

 

승하

말년의 큰 사건으로 불행한 시기를 보내다가 1314년 사냥을 하던 도중 낙마사고로 인해 병석에 누워있다 건강이 악화되어 46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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