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jong de Goreyo, 1019~1083, 재위1046~1083
출생
1019년 고려 개경 안복궁에서 아버지 현종(992~1031, 재위1009~1031)과 어머니 원혜왕후 김씨(4비, ?~1022)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왕서→왕휘.
배경
고려 황금기의 군주이며 행정이 정비되고 문화, 예술이 발전하여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문종은 군주 스스로 자체가 근면하고 검소해야한다고 생각해 부지런함은 기본에 재물을 아껴썼다고 한다. 학문을 숭상하고 비록 친인척, 친한사람일지라도 관직을 쉬이 내주지 않고 그에 적합한 인물을 천거해 관직에 올렸다고 한다.
특히 문종은 관리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까다롭고 직접 뽑아 천거했다고 한다. 많은 수의 관리를 등용하지 않아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비용이 축소됨과 동시에 절약되면서 나라가 부유해졌다고 한다. 고려 백성들은 이때를 태평성대라고 한다.
고려 군주중 최초로 '폐하'경칭으로 불리게 된 군주로 문종이후 예종, 인종, 의종, 명종, 고종등이 있다. 고종이후로는 원종때 몽골의 간섭으로 못불리다 충렬왕때부터는 원간섭기에 들어가며 '전하'로 격하된다.
재위
1046년 이복 형 정종(1018~1046, 재위1034~1046)이 승하하고 정종의 유언대로 문종으로 황위를 계승하게 된다. 재위에 오름과 동시에 문하시중(총리격) 최충(984~1068)에게 율령(형법, 공사제반, 칙령, 시행규칙등을 총칭하는 법체계)을 정비하게끔 지시하여 근간을 마련하게끔 한다.
이복형인 덕종(1016~1034, 재위1031~1034), 정종(1018~1046, 재위1034~1046)이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해서 즉위하자마자 국가발전에 몰두하게 된다.
배경에도 언급했듯이 군주부터가 검소해야한다고 생각해 어좌, 침실모두 간소화했다. 군주가 이렇게 하는데 신하들이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불교 의식중 하나인 윤경회(경전신앙의 공덕을 여러 사람이 나누는 신앙행위)가 각 지역마다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앙적 의미를 떠나 강제적으로 열려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악용되는 케이스가 문종때 딱 걸려 문종이 윤경회가 폐지된다.
조세
1049년(문종3년) 양반공음전시법(공음이 있는 관료를 대우하기위한 제도)이 시행되게 되는데, 이는 5품이상의 관리들에게 상속가능하고, 신분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한다. 물론 잘못하면 깎여서 지급. 1076년(문종30년) 경정전시과가 시행되는 첫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공음전시법은 관리의 생활을 안정화시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함을 추구하고, 백성들의 수탈을 방지하기위함이라고 한다.
기준 직위 | 전지 (단위:결) |
시지 (단위:결) |
비고 | |
1품 |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 | 25 | 15 | 고려의 정1품은 명예직이 대부분이라 정2품인 문하시랑평장사가 사실상 1품대우를 받음. |
2품 | 종2품 참지정사 | 22 | 12 | |
3품 | 정3품 어사대부 | 20 | 10 | |
4품 | 종4품 국자사업* | 17 | 8 | |
5품 | 종5품 어사집산* | 15 | 5 |
*이부분은 확실치 않아 대략적 품계가 나뉘는 기준점 직위를 써놓았습니다. 혹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 남겨주세요.
그리고 1050년 천재지변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세금을 면제시켜주는 '재면법'시행과 농작물 피해정도에 따라 세금을 감면시켜주는 '답험손실법'등을 제정하면서 안정을 꾀했다.
불교와 의천
천태종 창시자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바로 문종의 넷째아들이다. 1065년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할지 묻다가 의천이 스스로 출가를 자원해 영통사에 들어가 이미 승려가 되어있던 외삼촌 경덕국사(어머니 원혜왕후의 남자형제)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문종은 또한 고려의 대사찰(수천명의 승려가 거주할 수 있음) 흥왕사를 1067년 창건하고 이후 송나라에 순례를 갔다가 선종(1049~1094, 재위1083~1094)에 의해 귀국하여 흥왕사 주지가 된다.
1천년전 계몽군주?
문종은 또한 백성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을 겪는이가 없도록 하는 것과, 억울하게 끌려와 처벌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군주 스스로 재심사하여 최대한 처벌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주동자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지었을 정도.
1062년엔 문종이 삼원신수법(죄수를 심문할 때 반드시 형관3명이상을 입회케끔 해 조사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조치법)을 마련하여 최대한 형률의 공정성을 높이는 효과를 받게 된다. 1700년대들어 동,서양에서 나타난 계몽주의 성향에 입각한 군주들이 나왔던 것에 비해 700여년정도가 더 빠른편?..
황권 강화
고려 12주에 배치된 절도사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 관제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하는데, 다음 표와 같다
성종 (982) | 현종 (1018) | 문종 |
12절도사 | 4도호부 | 남경(서울) 설치 |
7도단련사 | 8목 | 12절도사 폐지 |
11단련사 | 56주 | 개성부 복구 |
21방어사 | 56군 | |
15자사 | 28진 | |
20현 |
남경을 설치하여 기득권들이 머무르던 수도 개경, 서경, 동경의 기득권층을 견제하고자 도모하는데, 문종 사후 큰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격하되었다가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때 잠시 수도가 되었다가, 조선대에 들어서 수도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또한 앞서 언급한 흥왕사를 황권 강화를 위한 중심 사찰로 급부상시킨다만 이후 승려들이 세속화되면서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어간다.
승하
고려 군주중 두번째로 오래 재위[37년, 1위는 23대 고종(46년)]하면서 고려가 크게 부흥하면서 고려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기의 주인공이 된다. 1083년 당시로서는 장수한 65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장남 순종(1047~1083, 재위1083)에게 황위가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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