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고려의 군주

1대 태조(고려)

Mintaka5 2024. 8. 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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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jo de Goryeo, 877~943, 재위918~943

 

 

출생

877년 통일신라 한산주 송악에서 아버지 왕륭(추존 세조, ?~897)과 한씨 부인(추존 위숙왕후,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475년간 지속된 고려왕조를 창업한 창업군주이다. 송악의 호족 왕륭의 아들로 궁예의 장수로서 여러 전공을 세워 젊은 나이(30대)에 태봉국 시중(총리격 지위)에 올랐음. 궁예의 폭정으로 일어나게된 4기장(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과 무장, 호족들의 지지로 궁예를 퇴위시키고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이후 신라의 고려귀부, 후백제 멸망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여 통일 고려를 운영하게 된다. 29명의 부인을 둔것은 유명한 사실.

 

경력 시작

아버지 왕륭은 송악의 호족으로서 궁예(869~918, 재위901~918)가 896년 군사를 일으켜 거병을 할때 수하로 합류하게되어 후고구려(901~904, 마진904~911, 태봉911~918)의 신하로서 아들 왕건과 함께 궁예의 신하가 된다. 병법에 밝았고 덕망이 많은 왕건의 곁에 항상 추종자들이 넘쳐났고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는데, 궁예는 898년 겨우 21세가 된 왕건의 이런 능력을 믿고 군사를 주어 다른 호족세력(양주, 충주, 청주등)을 평정하게끔 시킨다. 

892년에 이미 완산주(현재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에서는 견훤(867~936, 재위900~935)이 후백제(2대 44년, 892~936)를 세워 신라까지 다해서 외세의 간섭없는 후삼국시대(900~936)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인연?

이 내용은 2대 혜종편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간단히 줄여 언급하겠다[출처- 고려사, 1451].

903년경 왕건은 후백제령이였던 나주일대를 점령하면서 후방에서 후백제를 견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는데, 마침 나주에 머무르면서 시냇가 근처를 산책하고있던 왕건의 눈에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처녀의 뒤에 오색구름 같은 기운이 서려있다고 전하는데 이를 보고 왕건은 밤에 바로 데리고 직행한다. 왕건은 이 처녀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이 처녀가 바로 미래의 장화왕후가 되는 오씨인데 그렇게 해서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후일 고려 2대 혜종이되는 왕무(912~945, 재위943~945)이다. 

 

갈길이 멀다..

이 이후로도 후백제군과 치열한 공방을 거듭하면서 나주를 후백제에게 뺏겼다 뺏었다를 반복하게되면서 국경선이 시시각각 변하게 되는데.. 이후 궁예가 변방에나가 발로 뛰어 쟁취한 왕건의 공로를 인정해주면서 913년 불과 36세라는 나이에 태봉국 최고 직책인 시중(총리격)에 오르게 되면서 태봉국 2인자가 된다. 원래부터 성품이 곧고 덕망이 많았지만 공정했던 왕건은 직접 발로 뛰며 태봉의 백성들을 직접 돌보며 인기를 계속 얻어갈 때,

원래부터 간사하고 아첨질하고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물이였던 아지태()가 궁예의 마음을 얻기위해 같은 동향 출신이던 3명(입전, 신방, 관서)을 반역혐의로 고발하는데 죄도없는 이를 고발하였으니... 수사도 잘 되지않고 판결도 나지 않은점을 수상히 여긴 시중 왕건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파악한 결과 아지태의 모함이였다는 것을 알아내고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관심법

말이 필요없는 궁예의 초필살기(신통력).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뜻.

I. 형님폐하.. 저 이제 변방으로 보내주세요

시중으로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백성들의 억울함또한 해결해줌에 있어 왕건의 명성이 점점 더 드높아지면서 왕건은 혹여나 주군인 궁예가 이를 시기해 자기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면서 궁예에게 자신을 변방으로 보내달라고 청하게 된다. 궁예또한 왕건의 입지가 강화됨에따라 점점 위협을 느끼고있던 상태였어 마침 딱 타이밍 맞춰 이야기하였기에 바로 왕건의 시중직위를 거두고 변방으로 가게끔 한다(이 모든게 관심법)..

II. 철퇴

궁예는 이 관심법으로 터무니없는 근거로 많은 신하들을 죽여버리는데 궁예의 관심법의 결론은 항상 역모죄(마군)로 철퇴를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런 광경을 시중으로서 직접 지켜본 왕건으로서는 매우 공포스러웠을 것.. 궁예는 왕건에게 충성심을 테스트하기위해서 관심법을 썼다는 것도..플러스 

궁예의 책사 최응(898~932)이 고의로 왕건앞에 붓을 떨어뜨리고는 왕건에게 '빨리 복종해야 살것'이라 하여 역모를 시인하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시인하면서 궁예가 만족했다는 일화가 있다.

III. 호족과의 갈등은 이때도 마찬가지네..

궁예는 재위에 오르면서부터 자기를 도와준 호족들의 세력에 자꾸 신경이 거슬렸는지 이때역시 관심법으로 숙청을하게되는데 그과정에서 궁예는 왕비인 강비(왕후 강씨, ?~915)가 915년 그녀가 간통했다는 것을 관심법으로 다 봤다고 하여 불에달군 쇠꼬챙이로 왕후의 음부를 지져 사망케끔하고, 두아들 신광, 청광도 죽여버린다.

 

4기장과 즉위

이런 궁예의 도가넘은 폭정에 반감을 느끼는 신하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왕건을 새로운 군주로 옹립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 왕건을 찾아와 혁명을 도모하고자했던 4명의 장수가 나오게 된다.

  생몰년도 혁명당시 직책 비고
신숭겸 ?~927 궁예의 부장장수 평산 신씨 시조
복지겸 ?~? 태봉 마군 장군  
배현경 ?~936 태봉 마군 장군 대광에 오르게 됨
홍유 ?~? 정보없음  

이들을 4기장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포함해 김락, 염상, 견권등에 의해 추대된 왕건은 처음엔 반대했다가 이후 군사를 이끌고 궁예를 몰아내고 태봉을 멸망시키고 새나라 군주로 즉위하게 되는데, 918년 즉위하면서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로 한다.

철원에서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고향인(송악의 호족) 송악으로 수도를 이전함으로서 국가통치기반들을 마련하게 된다. 물론 호족세력들의 권력을 견제할 목적으로도. 고려의 건국이념을 숭불정책을 삼아 정책들을 추진하게 됨. 

 

좀 제대로 들어와라..

I. INT 0의 난

궁예의 수하이자 마군장군이였던 환선길(?~918)이 태봉을 멸망시키고 주군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왕건이 즉위한지 4일만이 되는 날이였다. 어이없게도 환선길역시 왕건의 계략에 넘어가 궁예를 축출할 혁명에 가담했었는데, 고려건국이후 자기도 목숨이 날라가지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왕건을 죽이기로 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복지겸에게 발각되어 왕건이 알게되지만 증거가 없어서 그냥 넘어가버린다.. 왕건과 회의를 하고있던 틈을 타 칼을 겨누지만 오히려 왕건은 당황한기색을 보이지 않게되면서 혹여나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한 환선길이 런 치지만 너무나 가볍게 잡혀서 처형당해버린다.

II. 이흔암의 난

궁예의 신임이 두터웠던 또 한명의 신하인 이흔암(?~918)은 부인이 환선길의 누이였고 마군대장군까지 오르게 되는 인물인데, 왕건이 즉위하고 철원으로 오게되면서 왕건의 측근 염상(생몰년미상)이 이흔암을 수상히여겨 왕건에게 고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두면서 감시할 것을 건의하게되면서 지켜보는데, 이때 이흔암의 처 환씨 부인으로부터 증거(증거라기엔 애매한 말)를 잡아 붙잡혀온 이흔암이 자백하고 참수됨. 그러나 이는 웅주 호족 이흔암을 증거없이 처형했다는 말도 있다.[출처 - 고려사 이흔암 열전]

 

어렵다.. 

고려가 918년 개국을 하고 왕건이 나름대로 잘 이끌어갔지만 호족연맹체 태봉이 무너지면서 자연스레 결집력이 약해지면서 고려의 초기 입지또한 흔들리게 됨에 따라 왕건은 호족들까지 신경써야하는 와중에 후백제는 넓은 농지에서 나오는 쌀 생산과 더불어 경제력 측면에선 고려를 앞지르고 있던 상황이라 꽤나 고심했을 것 같다.

이에 왕건은 호족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각 호족의 자녀, 인척등과 결혼을 하며 지지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왕건의 고난 X단계

I. 대야성

건국초기 왕건은, 후백제와 갈등을 빚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 우호적인 관계를 이끌어내려고 하는데 그 관계는 920년 견훤(867~936, 재위900~935)이 대야성을 점령하여 합천일대를 후백제령으로 만드는바람에 깨어지고 만다. 이에 화들짝 놀란 국경지대 후백제령에 속해있던 호족들이 고려로 귀부하게 되고 대야성전투로 인해 신라가 고려에 원병을 요청해 후백제군을 물러가게끔 함으로서 신라가 고려에 한층 더 의지하게 되는 반사효과가 생긴다.

II. 조물성전투와 왕신

지금의 경북 주요도시 지역의 호족들이 922년부터 연달아 고려에 귀부하게되면서 후백제 견훤으로서는 위기의식을 느껴 조물성을 점령함으로서 위기를 타파하고자 하는데, 924년 신검(?~?, 재위935~936)과 양검(?~936)을 보내 공격케끔하는데, 이때 왕건은 애선(?~924)장군과 왕충(?~?)을 보내 조물성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애선이 후백제군에 의해 전사하고 조물성내 군민이 지켜낸다. 

925년엔 충북 연산진(충북 청주)에 유금필(?~941)에게 공격케끔하며 후백제군 수백여명을 전사시키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는 대성과를 거두면서, 제대로 빡이 친 견훤이 직접 3천병력을 이끌고 출전해 고려군과 붙지만 협상을 봐 화의를 맺는데, 화의조건으로 왕건이 사촌동생 왕신(?~926)을 인질로 보내 견훤에게 '상부'로 높여 부르면서 화해를 청하고, 견훤도 역시 사위 진호(?~926)를 인질로서 고려로 보내게 된다. 조물성은 결국 후백제에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화의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왔던 진호가 갑자기 병으로 죽게되면서, 견훤은 고려에서 진호를 독살했다고 생각하고 왕신을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조물성 위쪽 운주, 웅주를 점령시켜버린다.

III. 공산전투

927년 견훤이 지금의 경북 안동근처를 공략하는데 고려군과 한창 싸우다가 진로를 갑자기 경주로 틀어 궁으로 쳐들어가 점령하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던 신라 55대 경애왕(?~927, 재위924~927)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경애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지면서 왕족들을 많이 죽이고 김부(경순왕, 897~978, 재위927~935)를 왕으로 앉혀버리는데, 이때 견훤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내려와 고려군이 구원병으로 올것을 예상하고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대전투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공산전투이다.

이 공산전투는 2000년 방영 드라마 태조왕건에 자세히 묘사되어있는데 왕건은 이때 후백제군에 역매복으로 포위되면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같이 출전했던 장군 신숭겸이 왕건으로 변장을하고 김락, 전이갑형제들과함께 왕건에게 퇴로를 마련해줌으로서 왕건은 무사히 대피하지만 신숭겸, 김락, 전이갑형제들과 함께 후백제군에 의해 전사하게 된다. 

왕건은 신숭겸의시신을 수습할때 매우 슬퍼하였는데 고이 장사지내주고 고려로 돌아가서 이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8명의 충성스런 장수들을 기리기위해 공산을 팔공산이라 이름지었다.  

 

이제 좀 나아지나?...

공산전투의 패배로 고려는 후백제군에 영향권을 넘겨주게 되고, 후백제는 경상도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견훤군은 침략과 더불어 노략질, 패악질등을 부리면서 호족들의 불만을 사게 되면서 이 호족들이 다시 고려로 귀부하게 되는 계기가 되면서 왕건에게는 기회가 온 것이였는데 하나의 변수가 더 작용하는데, 926년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 발해국 마지막 군주 대인선(?~926, 재위)의 아들인 세자 대광현(?~?)이 왕족과 2만여호에 달하는 유민을 데리고 왕건에게 귀화하게되는데, 마침 침체기였던 고려에 한줄기 희망과도 같은 일에 왕건은 대광현일행을 모두 극진히 맞이하고 대광현에게 왕씨성을 하사해 왕계라 이름지어주고 왕실의 일원으로 들이게 된다. 이때 온 유민들로인해 부족한 군대의 규모가 커지게 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여러 전투를 거쳐 고창(현재 경북 안동)에 모여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격돌하게 되는데 명장 유금필의 활약으로 후백제군 8천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승리를 거둠으로서 왕건은 삼한전체의 영향력을 장악하게 되고 후백제는 쇠퇴기를 겪게된다. 

이후 후백제는 상귀장군을 수군으로하는 함대를 개성에 상륙시켜 개경을 포위시켰지만 박수경 장군의 전술에 말려 다시 물러나게되고 이후 유배나와있던 유금필에게 또 격파당하면서 육군, 해군모두 고려로 가는 길이 모두 막히고 이는 고려로 투항하는 호족들역시 줄을 잇게되고 민심까지 잃게된다.

 

다와간다 조금만 더..

935년, 6년전에 빼앗겼던 나주 지역을 수복시키는데 이때 후백제 내분이 일어나 신검과 양검 용검 형제가 견훤이 이복동생인 금강(?~935)에게 태자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자 불만을 품고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폐위시켜 금산사에 유폐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를 틈타 나주지역을 수복시킨 것. 

금산사에 유폐당한 견훤이 유폐3개월만에 나주를 통해 고려로 탈출하게되면서 왕건의 상부가 되면서 신라 경순왕 역시 고려에 투항하겠다고 하게되면서 왕건에게 간다. 견훤은 자기가 만든 제국을 스스로 무너뜨리겠다며(서인석님 대사) 전투에 왕건과 함께 동참해 후삼국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전투(936)에서 신검의 후백제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면서 후백제는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신검은 항복을 하게 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며 왕건의 통일 대업이 완성된다.

 

통일 이후

936년 후삼국통일 이후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군주답게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서경)을 중요시해 마침 국경지대기도 한 겸 전통을 지키기위해 북쪽 경계의 전진기지로 삼아 수도 개경보다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그리고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받들어 숭불정책을 실시하게 됨으로서 본인이 직접 부처에게 직접 매일 불공을 들이며 군주스스로 모범을 보인다.

 

승하

943년 왕건은 임종을 앞두고 개국공신인 대광 박술희(871~945)에게 훈요10조를 내려 자손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칙으로 삼게끔 하게 한다. 장화왕후의 집안이 미약한 점으로 태자 무의 앞날이 걱정되어 박술희에게 태자를 부탁하고 943년 승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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