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Bonaparte,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세

Mintaka5 2024. 6. 2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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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poléon Ier(1769~1821, 재위1804~1814, 1815)

나폴레옹1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69년 제노바 코르시카 섬 아작시오(Ajaccio)에서 아버지 샤를-마리 보나파르트(Charles-Marie Bonaparte, 1746~1785)와 어머니 레티지아 보나파르트(Letizia Bonaparte, 1750~1836)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남.

 

촌놈

보나파르트 가문자체가 대대로 법조인을 많이 배출했던 사교계 주요가문중 하나로, 귀족가문의 어린 자녀들의 공통적인 교육방식인 사관학교에 입학하지만 하급귀족에 지나지않던 나폴레옹은 촌놈으로 놀림을 받기 일쑤, 거기다가 상급귀족들이 대부분인 곳에서 어눌하고 서투른 프랑스어 구사로 인해서 무시당하고 놀림받게됨.

1785년 아버지가 위암으로 일찍 사망(38세)해버려 사실상 나폴레옹도 어머니와함께 차남으로서 학업과동시에 일을 병행하면서 사실상 가장역할을 해오면서 가업을 이어나가게 됨.

 

포병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면서 나폴레옹이 가족을 책임지고자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게되는데 병과는 포병. 필자또한 포병출신으로서 수학적지식, 물리학적지식이 요구되는 만큼 나폴레옹이 상당한 이과적인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무려 졸업논문 심사위원이 라플라스..(Pierre-Simon de Laplace, 1749~1827).. 물론 통과하고 이후 생도58명중 42등의 성적으로 소위로 임관(1785년). 

 

파올리

코르시카 정치인 파스콸레 디 파올리(Pasquale di Paoli, 1725~1807)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인물은 나폴레옹의 아버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의 상관인데, 보나파르트 가문과의 악연이 되는 인물로서,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의 아버지 샤를 마리와의 갈등으로인해(어떻게 코르시카를 독립시켜야 하느냐라는 과정에서 관점차이로 인한 갈등) 별개의 노선을 걷게 됨.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식 모델의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던 파올리가 꿈꿨던 코르시카의 진정한 독립은 이후 나폴레옹이 나폴레옹1세로서 프랑스 황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프랑스에 흡수가 되어버린다.

 

역시 싹은 어릴때부터..

어릴적부터 상당히 평범하지만 친구들에게 언어로서도 조롱당하고 놀림받으며 사실상 무시받는 학교생활로 인해서 히키코모리 비슷한 생활을 하게되었지만, 역시 싹은 어릴때부터 보인다고 했던가.. 학교에서부터조차 스스로가 지휘자가 되어 진행하는 군사관련 서바이벌게임에서도 지휘에 관련한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이미 학교내에서도 그 소문이 퍼져 난리가 났을 정도.

 

대혁명이후 1799년까지.. 이게 말이되나?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을때 나폴레옹의 나이는19살의 중위계급. 이후 10년간 극적인 계급의 변화를 겪게되는데, 1791년 대위, 1793년 대령, 1795년 소장, 1799년 집정대신이라는 어마무시한 진급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경이로운 진급은, 당시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전례가없는 대혁명과, 장기적으로 이루어진 권력구도의 불균형으로 인해 나타나게된 변수가 나폴레옹에게 사실상 기회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 이를 나폴레옹이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 군인이라는 해석이 나오게 된다. 

무엇보다 1793년 중령시절에 터진 툴롱 공방전(Le siège de Toulon, 1793)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나게 되면서(1793년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면서 일어난 왕당파의 봉기)이때 나폴레옹의 귀신같은 작전으로 왕당파의 봉기를 누르고 공화파가 승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나폴레옹이 대위->대령이라는 3계급 진급이라는 무시무시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후 1799년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면서 3명의 집정대신으로 꾸린 정부의 제1집정이 되면서 드디어 역사속에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황제

제1집정이후 혼란스러운 프랑스의 분위기를 나폴레옹 특유의 결단력과, 실행력등으로 인기를 얻어 점점 입지를 굳혀오다가, 1804년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대관식에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0~1823, 재위1800~1823)를 파리로 직접 데려와서 보게 한 다음 진정한 황제가 됨. 프랑스의 황제가 아닌 프랑스인의 황제로서, 당시 혁명을 부정하지않고, 국민의 지지로인해 오른 황제라는 걸 강조.

그러나.. 권불10년이랬던가.. 1804년 즉위후 1814년 엘바섬유배까지 딱 10년.. 이후 100일천하까지 짧고 굵게 유럽역사의 한 획을 긋게된다.

황제에 즉위하고 난 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면서 라인동맹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세력확장.. 사실상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이 나폴레옹의 영향권에 들어가게되면서 영국과의 갈등이 발생하나,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와의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맞다이로 프랑스군이 전멸당하면서 결국 영국작전 포기. 거기다가 이후 이베리아반도에 30만명까지 갈아넣게 되면서.. 사실상 후퇴기 시작.

 

대륙봉쇄령과 러시아

이후 영국을 피말리게 하는작전인 대륙봉쇄령을 실행하게되지만, 쌩치고 영국과 거래하다 걸린 러시아를 조지기 위해 1812년 60만명이라는.. 말도안되는 병력을 러시아로 보내게 된다. 러시아도 그냥 바라만보고있지 않고 맞협박을 시전하게되는데,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1세(Alexandre Ier, 1777~1825, 재위1801~1825)가 프로이센까지만 닿고 가면 봐준다라는 식으로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60만이나 끌고왔는데 어떻게 돌아감?..)안통함.

글서 러시아도 결국 게릴라식으로 프랑스군의 진군속도를 늦추고 더 깊숙히 끌여들여 보급부대와 전투부대의 간격을 벌여 보급을 끊어버려 조지겠다는 속셈으로 청야전술을 펼치면서 계속 치고 빠지고 치고 하는 작전을 펼침. 그래도 어찌저찌 1812년 9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지만, 이미 모두 다 대피하고 불태워(보급을 받지못하고 힘빠지게하겠다는 플레이)버림.  이후 알렉산드르1세와의 강화에도 실패하면서(10월까지) 다시 철군을 하는데, 나폴레옹의 인생 최대의 시련이 펼쳐지게 된다. 러시아의 추위와 계속된 게릴라전투로 인한 손실과 원활하지 못한 보급으로인해 3만명이 복귀... (대실패)이때부터 나폴레옹이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때다 싶다

1813년 프랑스에 대항하는 세력을 위주로 결성된 대프동맹이 나폴레옹을 치기위해 라이프치히에서 대전투가 벌어지는데, 안그래도 러시아원정 대실패로 사기도 꺾였고 여론도 좋지 않은상태에서 또 전쟁이 일어나면서 무참히 깨어지기 시작하면서 후퇴를 하는데 설상가상 파리근처까지 밀리게되면서 사실상 패배. 이후 투항하게되면서 엘바섬으로 유배를 당하면서 프랑스는 사실상 해외에  피신해있던 부르봉왕가가 다시 복고되면서 루이18세(Louis XVIII, 1755~1824, 재위1814~1815, 1815~1824)가 프랑스의 왕으로 등극하게 됨(자세한 이야기는 루이18세 게시물 참고).

근데 어.. 엘바섬을 탈출하고 100일천하가 시작이 되면서 다시 황제에 오르는 나폴레옹으로서도 이젠 더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대프동맹을 대상으로 전투를 치르는데,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이젠 남대서양 한복판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됨으로서 나폴레옹 천하가 막을 내리고,

1821년 위암으로 서거(5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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