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nsa de Baekje, ?~392, 재위385~392
출생
출생년도는 미상이며, 아버지 14대 어라하 근구수왕(?~384, 재위375~384)과 어머니 아이부인 진씨(제1왕비,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남. 위로는 형 15대 침류왕(?~385, 재위384~385)이 있다. 본명은 부여진사.
배경
형 침류왕이 384년에 즉위하고 즉위한지 1년만에 서거해버리면서, 형의 어린아들 부여아신(미래의 아신왕, ?~405, 재위392~405)을 대신해서 본인이 백제의 어라하로 즉위하게 된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이 즉위과정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아신의 나이가 너무어려 숙부인 진사가 대신 즉위했다고 하고, 일본서기에서는 진사왕이 아신의 왕위를 찬탈해 즉위했다는 내용으로 적혀있다.
고구려
할아버지 근초고왕(?~375, 재위346~375)때부터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두 국가간 긴장감이 팽팽했는데, 그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때가 371년 고구려 대왕 고국원왕(300~371, 재위331~371)이 2년전 패배로인한 굴욕감을 설복시키기위해 백제 영토로 쳐들어가지만 근초고왕의 기습공격으로 대패하면서 평양성까지 역진격 당하면서 전투도중 고국원왕이 전사해버린다.
이 이후로 계속된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인해 긴장상태에 놓여있게 되는데, 백제는 이를 대비해서 371년 이후부터 고구려에 대한 방비를 튼튼히 하는 차원에서 관방(방어체계: 목책, 진등으로 적국군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방어시설)을 쌓게 하는데, 이것이 진사왕대까지 계속 공사가 지속되면서 전쟁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현장으로 보내 공사하게끔 한다.
담덕 네 이놈
시대를 잘못타고나도 한참 잘못타고난 진사왕.. 391년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고구려국경을 넘어 나름 이득을 취했지만 391년 고구려 19대 대왕 고담덕(광개토대왕, 374~413, 재위391~413)이 즉위하게 되면서 진사왕에게 재앙이 시작된다. 간자(간첩)들의 보고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북진정책을 우선삼았고 백제로는 침략할 가능성이 낮지 않겠느냐 판단해버린 진사., 392년 광개토대왕의 정예4만대군을 본진으로 착각해 다른쪽에서 진짜 광개토대왕이 공격하던 석현성(경기 동두천 일대)이 날라가버리는 생각 오류를 범하게 되어버리면서 석현성 인근의 소성을 빼앗기는 참패를 겪게 된다.
이후 한달도 안있어서 백제의 허파 관미성(교동도로 추정됨)마저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뺏기게 되는데, 특히 관미성은 바다를 끼고있는 절벽위의 요새로서 방어하기 아주 유리하고 교역의 핵심지역이라 백제의 GDP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성이였는데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겨버리고 만다.
아 이제 우짜노?
390년 고구려 도곤성(위치알려진바 없음)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포로 수백명을 잡아들이는 성과를 얻으며 왕의 권위가 살아나며 사냥과 왕궁건설등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썼는데, 광개토대왕에게 연패를 당하고 나서는 권위가 급속도로 추락하는데, 그와중에도 무리한 재정을 들여 왕궁을 건설하고 사치를 일삼는데 집중하게 되면서 백성의 원성과 분노와 함께 더욱 군주로서의 위신이 깎이게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사냥을 나갔다가 궁에서 죽었다고 되어있고 일본서기에서는 사냥을 나갔다가 암살을 당했다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알수는 없는 지경이라.. 둘중 하나가 무조건 맞아야한다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것은 안했으면 하는 바람. 아직 밝혀진 내용이 없기 때문에.
서거
7년간의 비교적 짧은 재위기간동안 즉위초기에는 나름 고구려의 성들을 공격해 국익을 취하고 할아버지 근초고왕때부터 이어온 전성기를 이으고자하는 욕구가 대단했지만, 광개토대왕이라는 희대의 거물을 만나게되면서 무참히 발리고 말년이 쓸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392년 서거. 서거이후 조카인 아신왕이 17대 어라하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