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235대 교황 우르바노8세(Urbanus PP. VIII, 1568~1644, 재위1623~1644)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234대 교황 | 235대 교황 | 236대 교황 |
| 출신 | 교황령, 볼로냐 | 피렌체 공국, 피렌체 | 교황령, 로마 |
| 명칭 | 그레고리오15세 Gregorius PP. XV |
우르바노8세 Urbanus PP. VIII |
인노첸시오10세 Innocentius PP. X |
| 생몰년도 | 1554.01.09 ~ 1623.07.08 | 1568.04.05 ~ 1644.07.29 | 1574.05.06 ~ 1655.01.07 |
| 콘클라베기간 | 2일 (1621.02.08~1621.02.09) |
19일 (1623.07.19~1623.08.06) |
1개월 8일 (1644.08.09~1644.09.15) |
| 재위 | 1621.02.09 ~ 1623.07.08 | 1623.08.06 ~ 1644.07.29 | 1644.09.15 ~ 1655.01.07 |

출생
1568년 4월 5일, 피렌체 공국 피렌체(Firenze)에서 아버지 안토니오 바르베리니(Antonio Barberini, 1529~1571)와 어머니 카밀리아 바르바도리 바르베리니(Camilla Barbadori Barberini, ?~1609)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35대 교황인 인물로서,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15세(Gregorius PP. XV, 1554~1623, 재위1621~1623)가 선종하여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다. 우르바노8세 즉위 당시 이미 한창중이던 30년 전쟁(1618~1648)이 시작된지 5년이 지났을 시점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에 즉위했다. 자신의 세력확대를 위해 족벌주의 정책을 펼쳐 자신의 가문인 바르베리니 가문은 세력이 커지고 부유해졌지만 그와 반해 교황령은 재정위기와 더불어 질서의 혼란이 야기되게 된다. 그리고 특히 추기경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당대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BC322)의 이론을 반박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해 태양계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어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서적을 1632년 발간하는데, 교회측의 격렬한 항의에 부딫히게 되면서 이에 납득을 할 수 없던 우르바노8세는 1633년 갈릴레이를 교황청으로 소환해 위 서적의 배포를 금지하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지동설을 지지 않던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하는데, 고령에 건강이 안좋았던 점을 고려해 가택연금형을 내리게 된다. 재판소를 나옴에도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는 일화는 현재로서는 근거가 빈약하다.
초년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부유한 상인이였던 아버지 안토니오 바르베리니(Antonio Barberini, 1529~1571)가 마페오가 3살무렵이였던 1571년 사망해 버리면서 마페오의 삼촌인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Francesco Barberini, 1528~1600)가 사도 대리 공증인이 되어 교육을 담당하였고, 피렌체 예수회에 입회해 모든 교육을 받은 뒤 로마로 가서 법학을 전공하고 1589년 피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미 1586년(18세 무렵) 성직 수여전 의식을 받았고 160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제 서품을 받는다. 1600년 삼촌 프란체스코가 선종하면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특유의 사치스러움으로 피렌체의 주요 인사가 된다.
성직
1604년 9월에 사제 서품을 받으나 재력으로 밀어붙여 당해 10월 대주교에 승품되고 심지어 1606년엔 추기경에 승품되는등 사제 서품을 받은지 3년도 안되서 추기경이라는 직위에 이른다. 1604년 12월 대주교에 있을 당시 프랑스 왕국 파리 교황청 대사로 가서 프랑스 왕 앙리4세(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입장이 된다. 이후 스코틀랜드,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스폴레토, 교황청 종교재판소 장관, 볼로냐 특사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1623년 콘클라베
1623년 교황 그레고리오15세(Gregorius PP. XV, 1554~1623, 재위1621~1623)가 선종하면서 교황청 시스티나 성당에서 콘클라베가 열린다. 3주에 걸친 콘클라베는 총55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되어 37차례에 거친 투표끝에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선출된다.
교황
I. 족벌주의
우르바노8세는 자신의 가문인 바르베리니 가의 세력을 확대하기위해 족벌주의 노선을 택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친다. 이에 가문의 재산은 불어나고 세력이 확대되지만 교황령의 재정은 파탄나기 직전까지 가고, 친족들을 성직에 등용하면서 성직자내 질서에도 혼란이 발생하면서 혼란을 겪는다.
| 가족관계 | 생몰년도 | 비고 | |
| 안토니오 마르첼로 바르베리니 Antonio Marcello Barberini |
동생 | 1569 ~ 1646 | 추기경 |
|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Francesco Barberini |
조카 | 1597 ~ 1679 | |
|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Antonio Barberini |
1607 ~ 1671 | ||
| 타데오 바르베리니 Taddeo Barberini |
1603 ~ 1647 | 팔레스트리나 공작, rhsvkffhsldpfp |
우르바노8세가 교황으로 통치한 21년(1623~1644)간 바르베리니가의 재산이 현재가치로 수천억원에 달한다고 추정치가 나오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부를 쌓은 것은 확실하다. 족벌주의로 인해 교황청, 교황령 내에서도 분란을 야기해 당시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미래의 교황 인노첸시오10세, Innocentius PP. X, 1574~1655, 재위1644~1655)추기경이 교황청 총리격 인사로 있을 때 이를 견제하는 등 반목하였다. 이후 후임 교황이 되는 팜필리 추기경은 즉위 후 족벌주의를 전면 폐지하는 노선을 가지게 된다.
II. 정치
교황중 마지막으로 교황령의 영토를 확장시킨 인물로서, 표면적으로는 교황령의 세력을 넓혀 교황의 권위를 바로세움으로서 권위를 세우고자하는 측면에 자신의 가문인 바르베리니가를 확장시킨다는 야욕이 숨어들어가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피렌체에서 부유한 재물을 바탕으로 사치를 함과 동시에 예술가와 과학자들을 후원했던 과거의 이력이 교황이 되어서도 적용되어 수많은 후원을 하여 이들을 양성하였다. 트리톤 분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 의자등 건축물과 장식물등을 예술가를 통해 의뢰를하여 이들에게 후원하는등 수많은 부분에 있어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게 된다.
III. 갈릴레이
이미 추기경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Garlileo Galilei, 1564~1642)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는데, 갈릴레이는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지동설(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다)을 접하고 지지하게 되면서 점차 이에 해당하는 서적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직자들의 반발이 커지면서 교황청까지 대립하게 되는데, 성직자들은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카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행위를 했다고 규정하여 갈릴레이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지만 갈릴레이가 이를 듣지 않으면서 검사성성에 고발되기에 이른다. 우르바노8세는 교황으로 즉위할 때 갈릴레오역시 초청받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음에 갈릴레이는 자신의 책을 적당한 수준에서 발표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로서 지동설과 천동설을 비교하는 측면에서 간접적으로 언급한 서적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성직자들에게 반발을 일으켜 우르바노8세에게도 한계가 온다. 그렇게 종교재판소에 회부된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지지않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고령을 이유로 가택연금형을 받고 풀려난다.
선종
1644년 선종하는데, 이후 열리는 콘클라베에서는 추기경들 사이에서 20여년간 전횡을 일삼은 바르베리니 가문을 절대로 교황으로 선출하지 말자는 여론이 발생하게 되고 우르바노8세 통치당시 족벌주의를 반대하고 묵묵하고 강직하게 교황청 행정전반을 이끌었던 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인노첸시오10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