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이폴리토 알도브란디니(Ippolito Aldobrandini)
231대 교황 클레멘스8세(Clemens PP. VIII, 1536~1605, 재위1592~1605)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30대 교황 | 231대 교황 | 232대 교황 |
출신 | 교황청, 볼로냐 | 교황청, 파노 | 피렌체 공국, 피렌체 |
명칭 | 인노첸시오9세 Innocentius PP. IX |
클레멘스8세 Clemens PP. VIII |
레오11세 Leo PP. XI |
생몰년도 | 1519.07.20 ~ 1591.12.30 | 1536.02.24 ~ 1605.03.03 | 1535.06.02 ~ 1605.04.27 |
콘클라베기간 | 3일 (1591.10.27~1591.10.29) |
21일 (1592.01.10~1592.01.30) |
19일 (1605.03.14~1605.04.01) |
재위 | 1591.10.29 ~ 1591.12.30 | 1592.01.30 ~1605.03.03 | 1605.04.01 ~ 1605.04.27 |
출생
1536년 2월 24일, 교황령 파노(현 이탈리아 마르케주페사로에우르비노현)에서 아버지 실베스트로 알도브란디니(Silvestro Aldobrandini, 1499~1559)와 어머니 리사 데티(Lisa Deti,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황 사목표어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도다(Sola fides sufficit)'이다.
배경
231대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로, 역대 교황 최초로 커피를 마신 교황이라고 한다. 사탄의 음료라는 인식이 팽배해있던 카톨릭계에서는 이를 이교도들이 마시는 음료로 규정하고 마실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었는데 클레멘스8세는 이 이교도들이 마시는 커피의 맛과 향에 매료되어 즐겼다고 한다. 피렌체에서 변호사를 하던 반메디치 성향의 아버지 실베스트로는 1537년 코시모1세 데 메디치(Cosimo I de' Medici, 1519~1574, 피렌체재위1537~1569, 토스카나대공1569~1574)가 피렌체 공작으로 집권하면서 추방당했다. 아버지는 추방당하고 파노 시장이였던 베네데토 아콜티 추기경()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Alessandro Farnese, 1520~1589)을 만나 교육을 받게 된다. 이후 158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여러 경력을 쌓으면서 1585년 교황 식스토5세(Sixtus PP. V, 1521~1590, 재위1585~1590)로부터 추기경 서품을 받고 1588년 폴란드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1590년 교황 식스토5세의 선종으로 열린 콘클라베와 우르바노7세(Urbanus PP. VII, 1521~1590, 재위1590)의 선종으로 자신이 선출되는 1592년 콘클라베 등에 참여한다. 교황에 즉위한 이후 이전부터 악화되있던 프랑스 왕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프랑스 왕 앙리4세(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와 화해를 하고 갈등을 해소시킴으로서 교회의 단결을 이끌어낸다는 평을 받는다. 평민에서 귀족,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공정하게 처벌과 보상을 하는 정책을 펴서 교황청의 기강을 잡아내어 안정을 이끌어내지만, 너무 엄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콘클라베
1592년 인노첸시오9세(Innocentius PP. IX, 1519~1591, 재위1591)가 선종하여 콘클라베가 열린다. 총64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54명이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3주간의 투표 끝에 이폴리토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이 만장일치로 231대 교황에 선출되게 되면서 클레멘스8세로 명명되어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냉혹한 교황
1592년 즉위한 이래로 평민에서 귀족,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권리를 규제함과 동시에 동등함을 부여함으로서 범죄에대한 특권을 없애버리는등 강경책을 쓴다. 자신에게 추기경을 서임했던 교황 식스토5세만큼 강경한 정책으로 철학적, 종교적으로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이면서 이단에게는 자비없이 화형을 선고하는(대표적인 예시가 1600년 화형된 조르다노 브루노)등 클레멘스8세 자신이 직접 재판에 나와서 진행하는 장면을 보면서 추기경들에게 확실한 진행을 요구했다.
II. 프랑스 위그노전쟁
1560년대초부터 발발한 프랑스 내전인 위그노 전쟁(1562~1598)초기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진 교황과 프랑스 왕 사이의 관계가 클레멘스8세가 즉위하면서 급속도로 화해모드로 진정되게 된다. 프랑스 교황 대사 아르노 도사 추기경(Cardinal Arnaud d'Ossat, 1537~1604)을 통해 협상을 함에 프랑스 왕 앙리4세(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가 1593년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더욱 신뢰를 가지게 되고 1595년 앙리4세를 직접 용서하고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으로 인정함으로서 프랑스의 안정을 이끌어내고 관계를 회복했다는 점이 주목받을만 하다. 스페인은 이런상황에 매우 불만이 컸는데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가 즉위 말년이였고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2세(Rudolf II, 1552~1612, 재위1576~1612)가 미약한 통치력으로 권위가 이미 분산되었기에 사실상 교황과 프랑스 앙리4세의 위협에 힘이 합쳐지지 않아 결국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평화조약인 1598년 베흐방 조약(La traité de Vervins, 1598)이 체결된다.
III. 오스만 제국
1592년 즉위이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유럽 내 카톨릭 군주들과 화합을 이끌어내기위한 노력을 계속 해오게 되는데, 첫 시작은 이미 오스만 제국과 일전을 벌이고 있던 신성로마황제 루돌프2세(Rudolf II, 1552~1612, 재위1576~1612)의 신성동맹 결성을 시작으로 여러 국가에 교황 특사를 보내 외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거기다 종교색이 다른 러시아 왕 표도르1세(Feodor I, 1557~1598, 재위1584~1598)와 오스만 제국의 적이였던 오스만 제국 동쪽에 위치했던 페르시아 샤 아바스1세(Abbas I, 1571~1629, 재위1588~1629)에게까지 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정통 카톨릭 강국이였던 스페인의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는 신성동맹에 참여하지는 않고 재정지원을 하겠다는 약속하는 것에 그치고 다른 국가들에서는 군대와 재정적 지원을 받음으로서 오스만 원정을 보내게 된다. 오스만 제국군과 상대하여 두번의 승리와 한번의 패배로 이전과 비슷한 상황에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이 중도에 공격을 포기함으로서 교황군은 큰 피해를 입고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선종
수년간 통풍을 앓아왔던 클레멘스8세는 1605년 69세의 나이로 선종하게 된다. 후임 교황은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 추기경(레오11세, Leo PP. XI, 1535~1605, 재위1605)이 선출되어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