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9대 황제 효종 홍치제 주우탱(孝宗 弘治帝 朱祐樘, 1470~1505, 재위1487~1505)
| 전임 황제 | 당시 재직 황제 | 후임 황제 | |
| 직위 | 명나라 황태자, 기왕(沂王), 명나라 8대 황제 | 명나라 황태자, 명나라 9대 황제 | 명나라 황태자, 명나라 10대 황제 |
| 가문 (황조) |
명(明) | ||
| 명칭 | 성화제(成化帝) | 홍치제(弘治帝) | 정덕제(正德帝) |
| 묘호 | 헌종(憲宗) | 효종(孝宗) | 무종(武宗) |
| 휘 (이름) |
주견심(朱見深) | 주우탱(朱祐樘) | 주후조(朱厚照) |
| 출신 | 명나라, 북경(北京) | ||
| 생몰 년도 |
1447.12.09 ~ 1487.09.09 | 1470.07.30 ~ 1505.06.08 | 1491.10.26 ~ 1521.04.20 |
| 재위 | 명나라 황태자 1449.09.06 ~ 1452.05.20 |
명나라 황태자 1475.12.05 ~ 1487.09.22 |
명나라 황태자 1491.10.26 ~ 1505.06.19 |
| 기왕(沂王) 1452.05.20 ~ 1457.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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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황태자(복위) 1457.03.30 ~ 1464.02.28 |
명나라 9대 황제 1487.09.22 ~ 1505.06.08 |
명나라 10대 황제 1505.06.19 ~ 1521.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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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8대 황제 1464.02.28 ~ 1487.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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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70년 7월 30일, 명나라 북경(北京)에서 아버지 명나라 8대 황제 헌종 성화제 주견심(憲宗 成化帝 朱見深, 1447~1487, 재위1464~1487)과 어머니 효목황후 기씨(孝穆皇后 紀氏, 1451~1475)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명나라 중기 중흥을 이끈 중흥군주로 이름난 홍치제 주우탱은 어린시절 만귀비의 만행을 피해 몰래 조용히 양육되다가 1475년 부황 성화제의 부름을 받아 황태자로 책봉되고 이후 1487년 부황 사망직후 명나라 9대 황제로 즉위하여 국가 통치기반을 모두 정비하고 경연 시스템을 개설하여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열띤 토론을 통해 국정을 효율적으로 결정하여 백성들의 삶을 돌보는등의 안정된 정치력으로 백성들로부터 성군으로 추양받으며 홍치제 통치 시기 18년간을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고도 불릴만큼 중흥 군주로 꼽히게 된다. 그러나 말년으로 갈수록 정치에 흥미를 잃고 일부 손을 놓게 되면서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만행을 일삼는 일도 벌어진다. 1505년 6월 8일, 3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초년
헌종 성화제와 궁녀 기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나지만, 당시 성화제의 후궁이자 총애를 받던 만귀비(萬貴妃, 1428~1487)가 성화제와 후궁들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 강제로 낙태를 하게하고 매질과 함께 독살까지 일삼고 만귀비의 만행이 도가 넘자 당시 황후 오씨(皇后 吳氏, 1464~1509)가 훈계를 하였는데 만귀비는 황후 오씨마저 모함해 폐위시키게끔 해버린다. 궁녀 기씨는 어린 황자(미래의 홍치제)를 임신하였던 상태에서 만귀비로부터 낙태약을 강제로 먹임당하고 유폐당하는 신세였으나 만귀비의 행태에 치를 떨은 환관들과 궁녀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유폐된 별궁에서 황자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궁녀 기씨는 아이가 만귀비에 의해 독살당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환관에게 아이를 그냥 없애는게 나을 것이라고 하고 물에 던져달라고 부탁했는데 환관은 황자를 물에 던지지 않고 몰래 궁 밖으로 빼돌려 양육되게끔 한다. 이후 1475년 성화제가 모든 사실을 알고 어린 황자를 궁으로 불러들이고 황태자에 책봉시키지만 만귀비는 여러차례 어린황자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잘 모면한 황자는 살아남지만 결국 어머니 궁녀 기씨는 만귀비에게 독살당하게 된다. 이후로 1487년 부황이 사망할 때까지 황태자는 열심히 황제 수업에 집중하게 된다.
즉위
1487년 9월 9일, 부황 성화제가 사망한다. 황태자 주우탱은 부황을 이어 명나라 9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괴롭힌 만귀비는 이미 1487년 봄에 부황 성화제보다도 먼저 사망하나 홍치제는 즉위 이후 만귀비를 처단해야한다는 신하들의 상소를 그냥 없던일로 하고 덮어둔다. 홍치제는 즉위 원년직후 경연을 개설하면서 신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반영하고 또한 열띤 토론으로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시스템이였고 이런 시스템을 홍치제는 적극 활용한다. 부황 성화제때부터 주변에 붙어 전횡을 일삼던 간신배들을 포함해 부패한 관리, 환관들을 처리하는 옥사를 일으켜 명나라 내정을 다시 쇄신시킨다. 특히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을 개정해 법률을 정비, 개정하여 백성들의 삶에 맞추고 토지 제도를 개선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등용, 황제 스스로 공문서를 직접 열람해 결재하고 신하들과 토론하며 이중검토를 하여 최대한 효율을 짜내면서 '만기친람(萬機親覽)'방식으로 국정을 훌륭하게 운영함에 따라 홍치제 시기 명나라 건국 120여년만에 중흥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홍치제 재위 시기를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홍치제 재위 말년에 들어서는 정무를 소홀히 하여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해 국정에 혼란이 생기게 된다.
사망
1505년 6월 8일, 홍치제는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이후 황제는 장남인 주후조(朱厚照)가 명나라 10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