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15대 황제 희종 천계제(熹宗 天啓帝, 1605~1627, 재위1620~1627)
| 전임 황제 | 당시 재직 황제 | 후임 황제 | |
| 직위 | 명나라 황태자, 명나라 14대 황제 | 명나라 15대 황제 | 신왕(信王), 명나라 16대 황제 |
| 가문 (황조) |
명(明) | ||
| 명칭 | 태창제(泰昌帝) | 천계제(天啓帝) | 숭정제(崇禎帝) |
| 묘호 | 광종(光宗) | 희종(熹宗) | 의종(毅宗) |
| 휘 (이름) |
주상락(朱常洛) | 주유교(朱由校) | 주유검(朱由檢) |
| 출신 | 명나라, 북경(北京) | ||
| 생몰 년도 |
1582.08.11 ~ 1620.09.26 | 1605.12.23 ~ 1627.09.30 | 1611.02.06 ~ 1644.04.25 |
| 재위 | 명나라 황태자 1601.11.09 ~ 1620.08.28 |
명나라 15대 황제 1620.10.01 ~ 1627.09.30 |
신왕(信王) 1622.10.26 ~ 1627.10.02 |
| 명나라 14대 황제 1620.08.28 ~ 1620.09.26 |
명나라 16대 황제 1627.10.02 ~ 1644.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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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05년 12월 23일, 명나라 북경(北京)에서 아버지 명나라 14대 황제 광종 태창제 주상락(光宗 泰昌帝 朱常洛, 1582~1620, 재위1620)과 어머니 효화황태후 왕씨(孝和皇太后 王氏, ?~1619)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경
태창제의 맡아들이자 명나라 15대 황제로, 부황 태창제가 할아버지 만력제로부터 사실상 황위 계승이 배제되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상태에서 부황이 1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즉위하게 되지만, 환관 위충현이 섭정으로 임명되고 모든 국정을 섭정에게 맡긴 천계제는 자신의 취미인 목공에만 집중하고 그 사이 위충현의 국정농단과 전횡은 도를 점점 넘게 되고 사실상 황제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명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되는데, 결국 위충현도 천계제가 1627년 22세로 사망한 이후 급격하게 몰락하여 이후 숭정제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도망칠때 자살하면서 끝나게 된다.
초년과 즉위
15살이던 때인 1620년, 할아버지 신종 만력제(神宗 萬歷帝, 1563~1620, 재위1572~1620)가 사망하고 부황이 태창제로서 즉위하지만 즉위한 지 겨우 29일이 지나서 부황마저 갑자기 사망해 버리게 되면서 즉위하게 된다. 더욱이 부황 태창제도 할아버지로부터 황위 계승에서 거의 배제되다 시피하다 와서 주유교 역시 부황 태창제의 행보에 의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부황 사망으로 인해 즉위하게 된다. 15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였고 황제가 되기위한 준비가 매우 미흡하기도 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통치에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환관 위충현(魏忠賢, 1568~1627)이 천계제 즉위 순간부터 섭정을 하게 된다.
통치
천계제는 어린나이에 황제가 되기도 하였고 통치 부재를 우려한 신하들로부터 섭정 통치를 받게되면서 사실상 정치를 섭정 위충현에게 떠맡기고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특히 천계제는 목공에 재능이있었는데, 그러나 섭정 위충현에게 집중된 명나라의 정치는 위충현의 권위 남용으로 인해 전횡을 일삼고 뇌물수수를 통해 매관매직을 시도하고 안그래도 만연하던 부정부패를 더욱 극심하게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된다. 위충현은 붕당 동림파와 비동림파의 싸움을 통해 아래를 견제하고 자신의 개인 권위와 재산을 착복해나가는데, 특히 1623년 섭정이 된지 3년이 지났을 무렵 정보 기관인 동창(東廠)의 장까지 맡게 되면서 명나라 전반에 걸친 모든 정보를 손에 넣고 더욱 좌지우지 하게 된다. 국정이 더욱더 위충현에 의해 농단되게 되면서 황제보다 더한 권세를 가진 인물로서 전횡을 일삼게 되자 이듬해 1624년 동림당에서 위충현을 탄압하는 인물들이 나오게 되고 이들은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은 위충현을 희종에게 고발한다. 그러나 희종은 동림당의 위충현 고발건을 들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위충현은 오히려 이들을 공문서 위조를 통해 체포하여 잔혹하게 다룬다.
사망과 위충현의 자살
앞서 언급했던 위충현의 국정농단과 전횡은 대신들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묵인되어 위충현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는데, 권불십년도 채 되지 않은 1627년 9월 30일, 희종 천계제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위충현은 섭정이였기에 황제의 사망으로 자연스럽게 섭정직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희종이 사망하기 전 위충현은 희종의 아들들을 제거함으로서 유일하게 계승자로 남은 희종의 동생 주유검(숭정제)만이 황제가 될 수 있었는데 희종은 동생 숭정제에게 만큼은 자기가 교육을 받지 못해 명나라가 휘청거린 것을 우려해 교육만큼은 제대로 시켰다고 한다. 위충현은 어떻게든 숭정제의 즉위를 막기위해 온갖 음모와 더불어 반란까지 모의하려고 하였고 어쨌든 숭정제가 즉위하고 나서도 워낙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숭정제마저도 가만히 두지 못하다가 때를 노린 신하들로부터 위충현이 탄핵되고 이후 북경을 떠나자마자 체포령이 떨어지면서 도망가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