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왕조/명나라

명 의종 숭정제

Mintaka5 2025. 9. 2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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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16대 황제 의종 숭정제(毅宗 崇禎帝, 1611~1644, 재위1627~1644)

  전임 황제 당시 재직 황제 후임 황제
직위 명나라 15대 황제 신왕(信王), 명나라 16대 황제 복왕(福王), 남명 초대 황제
가문
(황조)
명(明) 남명(南明)
명칭 천계제(天啓帝) 숭정제(崇禎帝) 홍광제(弘光帝)
묘호 희종(熹宗) 의종(毅宗) 질종(質宗) → 안종(安宗)

(이름)
주유교(朱由校) 주유검(朱由檢) 주유숭(朱由崧)
출신 명나라, 북경(北京)    
생몰
년도
1605.12.23 ~ 1627.09.30  1611.02.06 ~ 1644.04.25 1607.09.05 ~ 1646.07.01
재위 명나라 15대 황제
1620.10.01 ~ 1627.09.30 
신왕(信王)
1622.10.26 ~ 1627.10.02
복왕(福王)
1643.xx.xx ~ 1644.06.19
명나라 16대 황제
1627.10.02 ~ 1644.04.25
남명 초대 황제
 1644.06.19 ~ 1645.06.15

명나라 16대 황제 의종 숭정제 주유검
명 의종 숭정제,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611년 2월 6일, 명나라 북경(北京)에서 아버지 명나라 14대 황제 광종 태창제 주상락(光宗 泰昌帝 朱常洛, 1582~1620, 재위1620)과어머니 효순황태후 유씨(孝純皇太后 劉氏, 1593~1615)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났다. 이복형으로는 명나라 15대 황제 희종 천계제 주유교(熹宗 天啓帝 朱由校, 1605~1627, 재위1620~1627)가 있다. 

 

배경

명나라 15대 황제 천계제의 이복동생으로, 형 천계제의 통치기간 대부분을 섭정으로 지낸 위충현이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은 것을 직접 목격하고 1627년 형이 사망하자 즉위하고 위충현을 처단하고 기울어진 명나라의 국정을 회복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기울이는데, 의심이 많고 신하들을 믿지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바람에 행정에 공백이 발생하고 결국 즉위원년에 발생한 이자성의 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세금과중으로 인한 백성들이 점점 더 많이 반군에 합세함에 따라 1644년 4월 결국 북경까지 포위당하면서 가족을 데리고 탈출한 뒤 자금성 북쪽 경산(景山)에서 회화나무에 목을 매 자진한다. 이후 명나라 직계는 무너지고 남명(南明)황조가 이어지게 된다.       

 

초년

태창제의 5남으로 위의 4명의 형들중 3명이 어려서 사망하고 유일하게 남은 형 주유교(천계제)가 부황 광종 태창제 주상락(光宗 泰昌帝 朱常洛, 1582~1620, 재위1620)이 즉위한지 29일만에 사망해 버리면서 형 주유교가 안그래도 부황 태창제가 할아버지 신종 만력제(神宗 萬歷帝, 1563~1620, 재위1572~1620)때부터도 계승순위에서 배제되어 방치되어있던 환경으로 주유교 역시 제대로 된 황제 교육도 받지도 못한 채 급작스럽게 즉위한다. 불과 15세로 즉위한 천계제는 나이가 어리기도 하였고 기반이 없었기에 통치의 공백을 우려하여 환관중 한명인 위충현(魏忠賢, 1568~1627)이 섭정이 되나 부정부패와 국정농단등으로 명나라를 뒤흔든 위충현은 1627년 천계제가 사망하고 주유검이 형을 이어 황제위에 오르게 되나 역시 어린나이로 인해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1년간 섭정통치를 하게 된다. 숭정제는 황위에 오르고 난 뒤 형 천계제때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은 위충현을 처단하고 국정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기울어진 국운

그러나 즉위 원년 이자성의 난(李自成之亂, 1627~1646)이 발생하게 되면서 즉위 초기부터 혼란이 발생하고 숭정제의 통치력이 시험대에 오르게된다. 특히 1600년대 전세계적인 이상기후로 인해 평균기온이 하강하고 이로인한 기상이변으로 인해 대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짐에 따라 세수가 걷히지않고 악화된다. 숭정제는 이복형 천계제가 황제교육을 받지 못한채 통치에 혼란을 주었던 이유로 숭정제에게 만큼은 제대로 교육을 시켰고 숭정제는 국정을 바로잡기위해 부지런하게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숭정제에게도 어릴적부터 이복형 천계제때 전횡을 일삼은 위충현등 눈치를 보면서 살았던 배경으로 의심이 상당히 많았고 그만큼 대신을 믿지못하고 독단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면서 숭정제 치세 때 핵심 요직에 앉은 신하들이 숙청 당하고 파면당하는등 국정에 공백이 발생하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즉위 원년부터 발발한 이자성의 난이 장기화되면서 더욱 많은 군비가 발생하게 되면서 그 배경엔 세금을 더 거두는 수가 존재하면서 백성들이 더욱 궁핍해지고 불만이 쌓이던 백성들 사이에서 참지못하고 반군이 되어 칼을 겨누는 형태로 점점 명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최후

그러다가 1644년 4월, 마침내 이자성 반군이 명나라 수도 북경(北京)을 포위하게 되면서 숭정제는 벼랑끝에 몰리는 신세가 된다. 북경 자금성 황궁에 있던 신하들은 혼비백산 도망가는등 혼란이 일다가 결국 1644년 4월 25일 숭정제는 혼란 속 자금성에서 가족을 데리고 탈출한다음 자금성 북쪽 경산(景山)에서 회화나무에 목을 매며 자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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