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12대 황제 목종 융경제 주재기(穆宗 隆慶帝 朱載坖, 1537~1572, 재위1567~1572)
| 전임 황제 | 당시 재직 황제 | 후임 황제 | |
| 직위 | 흥왕(興王) , 명나라 11대 황제 | 유왕(裕王), 명나라 12대 황제 | 명나라 황태자, 명나라 13대 황제 |
| 가문 (황조) |
명(明) | ||
| 명칭 | 가정제(嘉靖帝) | 융경제(隆慶帝) | 만력제(萬歷帝) |
| 묘호 | 세종(世宗) | 목종(穆宗) | 신종(神宗) |
| 휘 (이름) |
주후총(朱厚憁) | 주재기(朱載坖) | 주익균(朱翊鈞) |
| 출신 | 명나라, 안륙주(安陸州) | 명나라, 북경(北京) | |
| 생몰년도 | 1507.09.16 ~ 1567.01.23 | 1537.03.04 ~ 1572.07.05 | 1563.09.04 ~ 1620.08.18 |
| 재위 | 흥왕(興王) 1521.04.15 ~ 1521.05.27 |
유왕(裕王) 1539.02.19 ~ 1567.02.04 |
명나라 황태자 1568.04.08 ~ 1572.07.19 |
| 명나라 11대 황제 1521.05.27 ~ 1567.01.23 |
명나라12대 황제 1567.02.04 ~ 1572.07.05 |
명나라 13대 황제 1572.07.19 ~ 1620.0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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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37년 3월 4일, 명나라 북경(北京)에서 아버지 명나라 11대 황제 세종 가정제 주후총(世宗 嘉靖帝 朱厚憁, 1507~1567, 재위1521~1567)과 어머니 효각황태후 두씨(孝恪皇太后 杜氏, 1516~1554)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배경
명나라 12대 황제로, 부황 가정제 치세때부터 기울어진 국운을 어느정도는 덜 기울어지게끔 내치 안정화를 도모하여 명나라의 수명을 연장했다는 평을 받는 황제이다. 북방과 남방의 약탈을 막기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무역업을 활성화시켜 상당한 무역수지를 기록하는등 명나라 후기 중흥을 바라보게 되었으나 상당한 호색한으로 최음제를 과다 복용하여 30대 중반의 나이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35세라는 젊은나이로 사망한다.
초년
명나라 11대 황제 가정제의 3남으로 황위에 거리가 꽤 거리가 있었고 1539년 2월 19일 유왕(裕王)으로 봉해져서 조용히 지낸다. 그러나 위의 두 형이 모두 일찍 사망해버려서 자연스럽게 계승순위가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둘째 형이자 황태자인 주재예(朱在禮, 1536~1549)가 1549년 4월 14일 사망해버리면서 황태자위가 공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황 가정제는 3남 주재기에게는 황태자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가정제의 장남과 차남 모두 황태자로 책봉하고 난 뒤 사망했기에 3남 주재기 마저 황태자로 책봉할 시 사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황태자를 끝까지 책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위
주재기는 황태자의 신분이 아닌 유왕(裕王)의 신분으로 1567년 1월 23일, 60세로 사망한 부황 가정제의 뒤를이어 2월 4일, 대관식을 거쳐 명나라 12대 황제 융경제로 즉위하게 된다. 부황 가정제 46년 치세동안 화북지역 타타르족과 여진족이 약탈을 자행하고 남쪽 해안가에는 왜구가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가정제 스스로도 불로장생에 집착하여 어린 궁녀들의 생리혈을 이용해 단약을 만드는 믿기힘든 행위들과 학대로 인해 발생한 임인궁변(壬寅궁변, 1542)으로 가정제가 궁녀들로부터 교살당할뻔하기도 하고 간신들이 들끓는등 암흑의 시대였는데 융경제는 부황 치세때 피해를 입은 신하를 다시 임용시키고 직접 인재를 뽑아 내치를 우선적으로 안정하고자 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북방과 남방에서 일어난 약탈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토벌케끔 하고 국외 무역을 적극 추진하여 경제력이 다시금 회복되게 되며 유럽의 함선과도 교류를 하는 등 무역에 있어서는 상당한 이윤을 남기게 된다.
경계지역 문제와 말년
부황 치세시절부터 북방과 남방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하여 큰 피해를 야기시키던 타타르족, 여진족, 왜구등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도저히 두고볼 수 없던 융경제는 1567년 즉위 직후 대신들의 조언으로 몽골과의 대립을 조속히 종식시키고 몽골 칸 알탄 칸(Altan Khan of the Tümed, 1508~1582, 재위1571~1582)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는 별개로 융경제는 대신들에게 권력을 이양시키고 황제 자신은 주색잡기와 쾌락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30대의 건장한 청년이였던 황제는 최음제류의 약까지복용해 밤마다 궁녀와의 정사를 즐기는등 정치와는 무관한 생활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장기간 최음제 복용으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게 되고 결국 1572년 3월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서둘러 3남 주익균(미래의 만력제)을 4월 8일 황태자로 책봉시킨다. 황태자 책봉 이후 3개월여간 건강이 악화되다가 7월 5일 35세라는 젊은나이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