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우르바노2세

Mintaka5 2025. 6. 3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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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동 드 라주리(Odon de Lagery)

159대 교황 우르바노2세(Urbanus PP. II, 재위1088~1099)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158대 교황 159대 교황 160대 교황
출신 베네벤토 공국, 베네벤토 프랑스, 샹파뉴 신성로마제국, 비에다
명칭 빅토르3세
Victor PP. III
우르바노2세
Urbanus PP. II
파스칼2세
Paschalis PP. II
생몰년도 1027.xx.xx ~ 1087.09.16 1035.xx.xx ~ 1099.07.29 1050.xx.xx ~ 1118.01.21
교황선출기간 1일
(1086.05.24)
4일
(1088.03.09~1088.03.12)
5일
(1099.08.09~1099.08.13)
재위 1086.05.24 ~ 1087.09.16 1088.03.12 ~ 1099.07.29 1099.08.13 ~ 1118.01.21

159대 교황 우르바노2세 초상화
우르바노2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035년, 프랑스 샹파뉴(Champagne)에서 아버지 마일 드 샤티용(Miles de Châtillon, 975~1044)와 어머니 아베넬 드 몽포르(Avenelle de Monfort, 990~1032)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59대 교황이자 교회역사상 두번째 프랑스 출신 교황이다. 베네딕토회 수도사 출신으로 친구이자 스승인 쾰른 주교 브루노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 수도원장에 이른다. 1088년 테라치나에서 빅토르3세의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고 이전부터 마찰을 일으켜온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와 황제가 옹립한 대립교황 클레멘스3세와 대립하면서 교회 내부 기강을 잡으면서 외교력으로 신성로마제국과 맞선다. 이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지원함과 동시에 예루살렘과 중동지역을 점령하여 이슬람 세력을 멀리 밀어내지만 점령한 지역내에서 십자군들이 살인, 약탈, 강간등을 자행한 역사가 남게 된다. 

 

성직

랭스(Reims) 베네딕토회 수도사 출신으로, 수도 과정을 마치고 친구이자 스승인 쾰른 주교 브루노(Saint Bruno, 1030~1101)의 지도를 받으면서 부주교로 활동하게 된다. 스승인 브루노의 조언으로 1067년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수도원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당대의 사건인 1077년, 교황 그레고리오7세(Gregorius PP. VII, 1020~1085, 재위1073~1085)에 의해 파문당한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Heinrich IV, 1050~1106, 로마왕재위1053~1105, 신성로마재위1056~1105)가 카노사 성에서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빈 사건인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1077.01.28)이 벌어질 때 교황을 수행한 인물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후 1078년 교황 그레고리오7세에 의해 주교급 추기경에 서임되고, 1085년에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와 교황간의 논쟁을 중재할 목적으로 교황 특사로서 신성로마제국에 가기도 한다. 

 

1088년 교황 선거

1087년 9월 16일, 교황 빅토르3세(Victor PP. III, 재위1086~1087)가 선종한다. 그러나 교황 선거는 빅토르3세 선종 후 6개월이 지난 1088년 3월 12일에 실시되는데, 6개월동안은 이전 1080년에 대립교황에 오른 대립교황 클레멘스3세(Antipope Clement III, 1025~1100, 대립교황1080~1100)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의 지원을 받아 로마가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런 혼란틈속에서 교황 선거는 빅토르3세를 지지하던 추기경단들을 포함한 성직자단과 토스카나 백작부인 마틸다(Matilda of Tuscany, 1046~1115)등과 함께 1088년 3월 9일에 테라치나(Terracina)에 모여서 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4일간 진행된 교황 선거는 1088년 3월 12일, 전임 교황 빅토르3세가 지명했던 오동 드 라주리 추기경을 선출하고 교황직을 수락한 다음 우르바노2세로 명명한다. 

 

교황

I.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

우르바노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당일인 1088년 3월 12일 즉위식과 즉위미사를 거행하고 공식 즉위하지만,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대립교황 클레멘스3세를 상대해야했던 상황이였다. 사실상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7세가 대립하던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가 로마를 1084년 점령하고 세운 대립교황 클레멘스3세를 기점으로 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점에 우르바노2세는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7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전임 교황보다든 유연한 사고와 뛰어난 외교력으로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했다. 하인리히4세의 황자인 콘라트(Konrad, 1074~1101)에게 아버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조용시키고 밀라노 왕으로 제수한다는 뜻을 발표하여 부자간에 골육상쟁을 벌이게끔 하여 기회를 만들어보고자 하였고, 1089년 7월에 로마에 입성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옴과 동시에 대립교황 클레멘스3세를 티볼리(Tivoli)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로마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된 다음 멜피 시노드(The Synod of Melfi, 1089.09.10~1089.09.15)를 통해 교회 내부 문제와 규율등을 제정, 수정하면서 내부 기강을 다지고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도시들을 각각 방문하여 자신의 세력을 곤고히 하게 하고 1095년 3월, 피아첸차에서 공의회(1095.03.01~1095.03.07)를 통해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와의 대립구도에서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이후 크레모나로 이동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자 콘라트(Konrad, 1074~1101, 로마왕재위1087~1098, 이탈리아왕1093~1098)을 합법 상속인으로 인정하였다. 

 

II. 제1차 십자군 원정

우르바노2세는 클레르몽페랑(Clemont-Ferrand)에서 1095년 공의회를 여는데, 동로마황제 알렉시오스1세 콤니노스(Alexios I Komnenos, 1057~1118, 재위1081~1118)의 요청으로 셀주크 투르크 술탄국의 침략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보호하기 위해 십자군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역사상 첫 십자군 원정이기도 한 이 십자군은 서방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통합과 더불어 서방 교회의 우위권을 점하고자 하는 명분으로 유럽 국가내에서 1만의 십자군 병력이 모이게 되고 출전하기에 이른다. 당시 이슬람 왕조들은 서로 분열되어 십자군이 출정하고있던 시점에도 대립이 이어지고 있어서 뜻이 모아지지 않던 시점이라 십자군에 의해 니케아(Nicaea)와 안티오크(Antioch)등이차례로 공격당하고 점령당하는데, 결국에 1099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살인, 약탈, 강간등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중동지역에 십자군의 국가가 세워지게 된다.   

 

선종

우르바노2세는 1099년 7월 29일, 64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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