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고프레도 카스틸리오니(Goffredo Castiglioni)
179대 교황 첼레스티노4세(Caelestinus PP. IV, ?~1241, 재위1241)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178대 교황 | 179대 교황 | 180대 교황 |
출신 | 교황령, 아나니 | 신성로마제국, 밀라노 | 신성로마제국, 제노바 |
명칭 | 그레고리오9세 Gregorius PP. IX |
첼레스티노4세 Caelestinus PP. IV |
인노첸시오4세 Innocentius PP. IV |
생몰년도 | 1145.xx.xx ~ 1241.08.22 | ?~1241.11.10 | 1180.xx.xx ~ 1254.12.07 |
콘클라베기간 | 2일 (1227.03.18~1227.03.19) |
1개월 5일 (1241.09.21~1241.10.25) |
1개월 12일 (1243.05.16~1243.06.25) |
재위 | 1227.03.19 ~ 1241.08.22 | 1241.10.25 ~ 1241.11.10 | 1243.06.25 ~ 1254.12.07 |
출생
생몰년 미상이며, 신성로마제국령 밀라노에서 아버지 조반니 카스틸리오니 디 오토네(Giovanni Castiglioni di Ottone, ?~?)와 어머니 카산드라 크리벨리(Cassandra Crivelli,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79대 교황으로, 재위기간이 불과 17일에 불과한 교황이다. 시토회 수도원 출신으로, 추기경과 교황 사절을 거쳐 교황 그레고리오9세 선종 이후 열린 선거에서 호엔슈타우펜 프리드리히2세 황제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살아남아 교황으로 가까스로 선출되지만 이미 병약했던 몸으로 인해 17일 즉위후 선종해버린다.
성직
사보이(Savoy)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 처음 입회하고 수도사가 되어서 이후 사제품을 받고 1219년 고향인 밀라노 교구장 주교 교회법 고문으로 임명되어 일을 맡기 전까지의 행보는 알려진 바가 없다. 1227년 교황 호노리오3세(Honorius PP. III, ?~1227, 재위1216~1227)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오9세(Gregorius PP. IX, 1145~1241, 재위1227~1241)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고,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가 황제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194~1250, 재위1220~1250)의 제국 영지와 교황령이 맞닿은 지역인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면서 교황령 영토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2세에 충성을 맹세한 롬바르디아 지역 귀족들과 여러차례 접촉과 협상을 기울이지만 실패로 끝난다.
1241년 교황선거와 첫 콘클라베용어 사용
1241년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9세가 선종하면서 교황 선거가 소집된다. 이번 교황 선거는 선종한 교황 그레고리오9세와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가 황제 프리드리히2세와의 대립으로 인해 황제를 교황의 아래로 누르겠다는 목표를 가진 교황을 선출하는 목표를 가지는데, 14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4명이 불참한 10명의 추기경이 참석하였다. 4명의 불참추기경은 각각 황제 프리드리히2세의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거나 콘클라베 직전 사망해버리는데, 당시 로마 원로원 수장 오르시니가문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Matteo Rosso Orsini, 1178~1246)가 추기경들을 셉티조니움(Septizonium)에 감금시키고 교황 선출을 빨리 하라고 위협한다. 그렇게 1개월 5일(1241.09.21~1241.10.25)간 교착상태가 이어진 교황 선출 선거는 타협후보로 사실상 딱히 자격없고 건강도 좋지 않은 추기경 고프레도 카스틸리오니를 선출시킨다. 이번 교황 선출과정은 추기경들이 감금된 상태에서 선거가 진행되었어서 라틴어 '함께(Cum, 영어의 with)'와 '열쇠(Clavis, 영어의 key)'를 합성한 '쿰 클라비스(Cum clavis, 열쇠로 문을 잠근 방)'에서 유래하여 이때부터 콘클라베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었다.
교황
고프레도 카스틸리오니 추기경은 교황 선출 후 교황명을 첼레스티노(Caelestinus)로 명명한 후 첼레스티노4세(Caelestinus PP. IV, ?~1241, 재위1241)로서 즉위식을 거행하는데, 이미 혼란스러웠던 로마의 상황과 로마 원로원의 폭정으로 인해 악화될데로 악화된 정치상황은 첼레스티노4세에게는 버거운 정치상황을 예고했는데, 거기다 이미 건강까지 좋지 않았던 교황은 추기경도 선출하지 못하고 교황의 인장과 문장도 선포하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선종
1241년 11월 10일, 즉위한지 겨우 17일이 지난 시점에 첼레스티노4세는 이질로 인해 선종해버린다. 이후 콘클라베를 열기위해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Matteo rosso Orsini, 1178~1246)는 추기경들을 로마로 불러들이지만 지난 콘클라베때 감금당한채 고초를 겪었던 추기경들이 콘클라베를 거부하면서 1년 7개월(1241.11.10~1243.06.25) 가량의 사도좌 공석이 벌어진다. 1243년 5월 16일이 되어서야 후임 교황을 선출할 콘클라베가 아나니 대성당에 소집되면서 1개월 10일여간의 선거기간을 통해 6월 25일 교황 인노첸시오4세(Innocentius PP. IV, 1180~1254, 재위1243~1254)가 선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