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시니발도 데 피에스키(Sinibaldo de Fieschi)
180대 교황 인노첸시오4세(Innocentius PP. IV, 1180~1254, 재위1243~1254)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179대 교황 | 180대 교황 | 181대 교황 |
| 출신 | 신성로마제국, 밀라노 | 신성로마제국, 제노바 | 교황령, 로마 |
| 명칭 | 첼레스티노4세 Celestinus PP. IV) |
인노첸시오4세 Innocentius PP. IV |
알렉산데르4세 Alexander PP. IV |
| 생몰년도 | ? ~ 1241.11.10 | 1180.xx.xx ~ 1254.12.07 | 1199.xx.xx ~ 1261.05.25 |
| 콘클라베기간 | 1개월 5일 (1241.09.21~1241.10.25) |
1개월 12일 (1243.05.16~1243.06.25) |
6일 (1254.12.07~1254.12.12) |
| 재위 | 1241.10.25 ~ 1241.11.10 | 1243.06.25 ~ 1254.12.07 | 1254.12.12 ~ 1261.05.25 |

출생
1180년, 신성로마제국령 제노바에서 아버지 라바냐 백작 우고 프레스키(Conte di Lavagna Ugo Fieschi, ?~?)과 어머니 베이트리체 그릴로(Beatrice Grillo,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80대 교황으로, 파르마 대학교와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교황청에서 법률가로 일하다가 1227년 새로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오9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고 이후 교황대사를 거쳐 1241년 교황 첼레스티노4세가 17일만에 선종해버리면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하는 인물이다. 11년간의 치세동안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대립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제1차 리옹 공의회(The first council of Lyon, 1245)주도, 십자군 선포등 활동을 보이지만 호엔슈타우펜 왕조 만프레디 군에 교황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선종해버린다.
성직
파르마 대학교와 볼로냐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여 공부한 후 당대의 교회법학자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다. 1226년 교황 호노리오3세(Honorius PP. III, ?~1227, 재위1216~1227)의 치하에서 교황청 법률가로 일하고 이듬해 1227년 호노리오3세 선종 후 즉위한 후임교황 그레고리오9세(Gregorius PP. IX, 1145~1241, 재위1227~1241)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된다. 1235년에는 알벤가-임페리아(현 이탈리아 제노바 지역)의 주교 겸 북부 이탈리아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당시 신성로마제국과 국경지대이던 알벤가-임페리아에서 신성로마제국과 마찰이 있을 시 특사로서 즉각 신성로마제국으로 가서 중재를 도맡는 위치에 있게 되며 1240년까지 이 목구를 맡게 된다.
1243년 콘클라베
1241년 11월 10일, 교황 첼레스티노4세(Celestinus PP. IV, ?~1241, 재위1241)가 즉위한지 17일만에 선종해버리는데, 콘클라베는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인 1243년 5월 16일이 되어서야 열리게 된다. 이는 교황권을 위협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197~1250, 재위1220~1250)와의 분쟁으로 인해 첼레스티노4세 선종 후 후임 교황 선출이 두 국가간의 핫이슈로 떠오르면서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면서 1년 7개월동안 교황직은 공석으로 남게 된다. 1243년 5월 16일, 9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콘클라베는 아나니 대성당에 모여 투표를 진행하게 되는데, 1개월 12일이라는 기간동안 콘클라베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결론이 나지 않다가 1243년 6월 25일 사제급 추기경인 시니발도 데 피에스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인노첸시오4세로 명명한 뒤 즉위한다.
교황
I.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가
인노첸시오4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가 황제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194~1250, 재위1220~1250)와의 갈등이 이전보다 더욱 심화되는데, 정복을 시도하던 프리드리히2세의 야망을 잠재우기위해 여러차례 협상을 시도하지만 어려운 조건들을 걸고 넘어지는 프리드리히2세는 사실상 협상을 거부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교황령과 국경지대이던 롬바르디아 지방의 분쟁문제를 사실상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게 되면서 교황군과 맞서다가 비테르보에서 패배한 후 1244년 3월, 라테란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함에도 불구하고 롬바르디아 지역을 내주지 않으면서 교황은 이전에 자신에게 파문을 선포한것을 취소해줄테니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지만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파문을 완전히 철회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 자신이 빼앗은 교황령 영토 '일부'만을 양도시킨다. 인노첸시오4세는 이러한 황제의 행태에 도저히 가만히 둘 수 없었는지, 1245년 프랑스 왕국 리옹(Lyon)에서 공의회를 소집시키는데 이것이 제1차 리옹 공의회(시작1245.06.28)이다. 교황은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리로 온 타데오 다 수에사(Taddeo da Suessa, 1181~1248)를 통해 황제의 영토반환 의지를 보이지만, 교황은 이를 믿지 않고 공의회가 시작된지 1주일이 지난 시점인 1245년 7월 5일, 2차 회의에서 황제 프리드리히2세를 다시 재파문시키고 3차 회의일인 7월 17일, 자신이 내린 파문을 결정짓고 프리드리히2세를 황제위에서 물러나게 함으로서 신성로마제국 선제후들은 즉시 새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시작하게 되면서 1246년 5월 22일, 튀링겐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Heinrich Raspe, 1204~1247, 재위1241~1247)를 선출시키지만 제후들은 인정하지 않고 프리드리히2세의 아들인 콘라트(미래의 로마왕 콘라트4세)와 전쟁을 벌이지만 패배하고, 심지어 1247년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면서 다시 선거에 들어가서 빌럼2세(Willem II, 1227~1256, 로마왕재위1247~1256)가 새로운 로마왕으로 선출된다.
II. 7차 십자군
인노첸시오4세는 제1차 리옹 공의회를 통해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2세를 재파문시킴과 함께 동방에서 일어난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이슬람 맹주 호라즘 왕국을 전멸시켜버린 것과 호엔슈타우펜 왕조와의 시칠리아에서의 충돌에 무슬림까지 끼여서 교황에 대항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하는 것을 결정시킨다. 교황은 프랑스의 성왕이라 불리는 루이9세(Louis IX 'Saint Louis', 1214~1270, 재위1226~1270)에게 십자군의 조직과 전투 지휘를 모두 위임하여 운영하게끔 하지만 사실상 프랑스 왕국만이 참석하는 십자군 원정이였던 터라(잉글랜드 헨리3세도 십자군을 선포하긴 하지만 1249년 200여명의 기병만 지원)신성로마제국의 원정 출정이 절실했던 터라 루이9세가 직접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2세를 화해시키려고 하지만 둘다 거부하면서 단독으로 출정하지만 루이9세는 나일강 일대에 상륙해 진을 치지만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루이9세마저도 병에 걸려 무슬림 의사에게 진료를 받다가 체포되기까지 해버리면서 이후 4년간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고 프랑스로 돌아온다.
선종
1254년에 들어 호엔슈타우펜 왕조 만프레디(Manfredi, 1232~1266, 재위1258~1266)의 도발로 인해 사실상 계속 부딫히던 실정이였는데, 만프레디와의 일전을 하기 위해 1254년 하반기 교황은 나폴리로 입성하는데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는데, 1254년 12월 초에 자신의 교황군이 만프레디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12월 7일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