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기 푸쿠아 르 그로(Gui Foucois le Gros)
183대 교황 클레멘스4세(Clemens PP. IV, ?~1268, 재위1265~1268)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182대 교황 | 183대 교황 | 184대 교황 |
| 출신 | 프랑스, 트루아 | 프랑스, 생질 | 신성로마제국, 피아첸차 |
| 명칭 | 우르바노4세 Urbanus PP. IV |
클레멘스4세 Clemens PP. IV |
그레고리오10세 Gregorius PP. X |
| 생몰년도 | 1195.xx.xx ~ 1264.10.12 | xxxx.11.23 ~ 1268.11.29 | 1210.xx.xx ~ 1276.01.10 |
| 콘클라베기간 | 3개월 6일 (1261.05.26~1261.08.29) |
3개월 27일 (1264.10.12~1265.02.05) |
2년 10개월 (1268.12.01~1271.09.01) |
| 재위 | 1261.08.29 ~ 1264.10.02 | 1265.02.05 ~ 1268.11.29 | 1271.09.01 ~ 1276.01.10 |

출생
1190~1200년경 11월 23일 프랑스 왕국 생질(Saint-Gilles)에서 아버지 피에르 푸쿠아(Pierre Foucois, ?~?)와 어머니 마르그리트 루피(Marguerite Ruffi,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83대 교황으로, 군대에도 잠시 있었으며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와 법학자로서 살아가다가 프랑스 왕 루이9세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결혼했다가 아내가 사망한 후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자로서의 수련을 마치고 사제, 주교, 대주교를 거쳐 주교급 대주교로 서임된다. 3개월간의 콘클라베를 거쳐 교황이 되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2세 황제와의 대립으로 인해 변장하고 로마로 들어가는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후 시칠리아 문제를 두고 샤를 당주의 손을 잡아줌으로서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마지막 군주 콘라딘을 제거함으로서 샤를 당주를 시칠리아 왕으로 옹립시키고 그 과정에서 십자군으로 이탈리아 남부 무슬림 세력까지 몰아내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개인적으로 상당한 금욕주의적 사상과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족벌주의를 용납하지 않았고 부정부패를 매우 경계하여 인기가 좋은 교황이였다고 한다.
성직
젊은 시절 군인으로 생활한 적도 있는 기 풀쿠아는 전역한 이후 법학 공부에 전념하여 민법 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이자 법학자로서 명성을 쌓으면서 활동하다가, 프랑스 왕 루이9세(Louis IX 'Saint Louis', 1214~1270, 재위1226~1270)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귀족 여성과 결혼하고 두 딸까지 얻지만 1250년 아내가 사망하면서 홀로가 된 기 풀쿠아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255년 사제 서품을 받고, 1257년엔 교황 알렉산데르4세(Alexander PP. IV, 1199~1261, 재위1254~1261)로부터 주교 수품을, 1259년엔 대주교로 승품된다. 금욕주의적 사고와 엄격한 규율을 중시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성직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던 기 풀쿠아 대주교는 1261년 12월에 교황 우르바노4세(Urbanus PP. IV, 1195~1264, 재위1261~1264)로부터 주교급 대주교로 서임된다.
1264~1265년 콘클라베
1264년 10월 12일, 교황 우르바노4세(Urbanus PP. IV, 1195~1264, 재위1261~1264)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우르바노4세가 페루자(Perugia)에서 선종하였기에 이번 콘클라베는 로마가 아닌 페루자에서 열리게 되는데, 21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18명이 참석하고 3명의 추기경이 불참한다. 추기경들은 당시 시칠리아를 두고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197~1250, 재위1220~1250)의 아들인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Manfredi, 1232~1266, 재위1258~1266)를 지지하던 기벨린파와 프랑스 앙주가문 샤를 당주(Charles d'Anjou, 1226~1285, 재위1266~1285)를 지지하는 겔프파로 분열되어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콘클라베에서 팽팽하게 경쟁한다. 콘클라베가 장기화되면서 교착상태가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추기경들은 상황을 해결할 타협 후보로 불참한 추기경 중 한명인 프랑스 출신 추기경 기 풀쿠아 르 그로를 교황으로 선출시킨다.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 추기경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2세의 눈을 피해 변장을 하고 이탈리아 반도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교황
변장한 채 로마로 겨우 입성한 클레멘스4세는 이전의 명성처럼 엄격한 금욕주의, 도덕적 엄격함과 더불어 스스로에게 정직함으로서 교회내 기강을 잡고자 하였고, 이전 교황들로부터 전통적인 행보로 여겨져왔던 족벌주의를 행사하지 않고 부정부패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콘클라베 기간때부터 복잡하게 꼬여온 시칠리아 문제를 두고 신성로마황제의 아들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를 파문 시킨뒤 불법적 왕위찬탈자로 규정한다. 이러한 행보는 프랑스 앙주 가문 출신 샤를 당주가 결정적으로 클레멘스4세의 도움을 받아 1266년 만프레디와의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디를 전사시킴으로서 샤를 당주가 시칠리아에 입성하여 카를로1세로서 왕좌에 앉게되는 계기가 된다. 시칠리아 문제가 해결된 뒤 클레멘스4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지역에 있던 무슬림 세력과 결탁한 만프레디의 아들 콘라딘(Conradin, 1252~1268, 재위1254~1268)을 격파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하여 샤를 당주로 하여금 군 동원 승인을 받아 무슬림을 격파시키게 하고 콘라딘을 나폴리에서 참수시킴으로서 모든 시칠리아 문제가 끝이남과 동시에 무슬림까지 몰아내면서 일거양득을 취하게 된다.
선종
1268년 11월 29일, 병이 들어 비테르보에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