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피에르 드 타랑테즈(Pierre de Tarentaise)
185대 교황 인노첸시오5세(Innocentius PP. V, 1225~1276, 재위1276)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184대 교황 | 185대 교황 | 186대 교황 |
| 출신 | 신성로마제국, 피아첸 | 신성로마제국, 사보이 백국 | 신성로마제국, 제노바 |
| 명칭 | 그레고리오10세 Gregorius PP. X |
인노첸시오5세 Innocentius PP. V |
하드리아노5세 Hadrianus PP. V |
| 생몰년도 | 1210.xx.xx ~ 1276.01.10 | 1225.xx.xx ~ 1276.06.22 | 1205.xx.xx ~ 1276.08.18 |
| 콘클라베기간 | 2년 10개월 (1268.12.01~1271.09.01) |
2일 (1276.01.20~1276.01.21) |
10일 (1276.07.02~1276.07.11) |
| 재위 | 1271.09.01 ~ 1276.01.10 | 1276.01.21 ~ 1276.06.22 | 1276.07.11 ~ 1276.08.18 |

출생
1225년, 신성로마제국령 사보이 백국(The county of Savoy)에서 아버지(미상)와 어머니(미상)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프랑스 리옹 도미니코회 출신인 185대 교황으로 신학, 법학 석사학위까지 마치고 도미니코회 교수, 학과장, 총장을 맡으면서 당대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알베르토 마그누스등과 교류하면서 함께 강의와 더불어 운영을 하는 일을했다. 그러나 롬바르도 명제집에 대한 주석을 종전과 다른 방식을 택하여 해석하게 되어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교수직, 총장직에서 물러나지만 동료 교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도움으로 변호문을 작성해 발표하여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도리어 감복시켜 유명세를 타고 활발하게 성직활동을 하게되면서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10세로부터 대주교,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1274년 자신이 관구장으로 있던 리옹에서 열린 제2차 리옹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게되고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그레고리오10세가 리옹에서 로마로 돌아오던 도중 선종하여 교황이 선종한 아레초에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는 인물이다.
성직
1240년 리옹(Lyon) 도미니코회 수도회에 입회해 수사가 되어 수련과정을 거쳐 1250년대에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신학, 법학 석사 학위를 받고 1259년 사제에 서품된다. 당시 스콜라 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와 알베르토 마그누스(Alberto Magnus, 1200~1280)같은 철학, 신학자와 함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1264년까지 학과장을 맡고 이후 도미니코회 총장이 되는데, 피에트로 롬바르도 명제집 해석을 종전의 아우구스티노 방식과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이단혐의를 받으면서 교수, 총장직을 물러나게되지만 동료 토마스 아퀴나스의 도움으로 변호문을 작성해 오히려 혐의없음을 판정받고 통찰력에 감복한 사람들로부터 유명해져 프랑스 관구장이 된다. 1272년 교황 그레고리오10세(Gregorius PP. X, 1210~1276, 재위1271~1276)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가서 리옹 대주교로 서임되고, 당해에 주교급 추기경으로 승품된다. 2년뒤 그레고리오10세가 소집한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교구를 맡은 특성상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성공적으로 공의회를 마치게 된다.
1276년 1월 콘클라베
교황 그레고리오10세는 제2차 리옹 공의회를 마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올때쯤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게 되어 치료 목적으로 중간지점마다 멈춰서 치료를 받는등 조치를 취하게 되지만 로마로 돌아오기 전 아레초(Arezzo)에서 갑작스럽게 선종한다. 그렇게 콘클라베가 소집되게 되는데, 그레고리오10세가 선종한 아레초 산 피에트로 대성당으로 추기경들이 모여든다. 선종한 교황 그레고리오10세가 1274년 리옹 공의회 당시 발표한 칙서 'Ubi periculum'에 따라 처음으로 시행된 콘클라베이기도 하는 이번 콘클라베는 칙서의 내용에 따라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들은 폐쇄된 장소에 격리되어 진행되었고 심지어 콘클라베가 3일이상 지속될 경우 하루 한끼분량의 음식만 제공되고, 5일이상 지속될 경우 빵과 물만 제공된다는 것에 압박을 느낀 총15명의 추기경들은 콘클라베가 시작된지 이틀째인 1276년 1월 21일, 1차투표때 만장일치로 도미니코회 출신인 피에르 드 타랑테즈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시킨다. 그렇게 피에르 추기경은 교황명을 인노첸시오로 정하고, 인노첸시오5세로서 즉위하게 된다.
교황
인노첸시오5세는 아레초에서 교황이 되자마자 곧장 로마로 향하여 로마로 가던 도중 비테르보에서 프랑스인이자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이자 프랑스 앙주가문출신 로마 원로원 의원 샤를 당주(Charles d'Anjou, 1226~1285, 재위1266~1285)를 만난다. 자신역시 프랑스에서 자라고 프랑스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것 만큼 교황역시 정체성은 프랑스인에 가까웠고, 그만큼 샤를 당주를 편애하게되는데, 원로원 의원이였던 샤를 당주에게 충성서약을받고 토스카나를 책임지는 대리인으로 승인시키고 샤를 당주가 합스부르크 출신 로마왕 루돌프1세(Rudolf I, 1218~1291, 재위1273~1291)의 황제 대관식을 늦추자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내 프랑스의 영향력을 교황까지 같이 강화시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의 불만을 사서 이후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오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동방 정교회와의 합치를 위해 동로마 황제 미하일8세 팔레올로고스(Michael VIII Palaiologos, 1223~1281, 재위1261~1282)에게 서신을 보내 사절단을 보내겠다는 뜻을 밝히고 샤를 당주와 동로마황제간의 불화를 중재하여 평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선종
그러나 인노첸시오5세는 교황으로 즉위한지 5개월만인 1276년 6월 22일, 51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갑자기 선종한다. 짧은 재위기간을 가졌던 교황으로 자신이 임명한 추기경은 1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