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니콜라오3세

Mintaka5 2025. 6. 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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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Giovanni Gaetano Orsini)

188대 교황 니콜라오3세(Nicholaus PP. III, 1210~1280, 재위1277~1280)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187대 교황 188대 교황 189대 교황
출신 포르투갈, 리스본 교황령, 로마 프랑스, 투르
명칭 요한21세
Ioannes PP. XXI
니콜라오3세
Nicholaus PP. III
마르티노4세
Martinus PP. IV
생몰년도 1215.xx.xx ~ 1277.05.20 1210.xx.xx ~ 1280.08.22 1210.xx.xx ~ 1285.03.28
콘클라베기간 21일
(1276.08.19~1276.09.08)
6개월
(1277.05.30~1277.11.25)
5개월 3일
(1280.09.22~1281.02.22)
재위 1276.09.08 ~ 1277.05.20 1277.11.25 ~ 1280.08.22 1281.02.22 ~ 1285.03.28

188대 교황 니콜라오3세 초상화
니콜라오3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10년, 교황령 로마(Roma)에서 아버지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Matteo Rosso Orsini, 1178~1246)와 어머니 페르나 가에타니(Perna Caetani,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로마의 유력 가문이던 오르시니 가문출신 188대 교황으로, 1244년 부제급 추기경에 올라 7회에 달하는 교황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투표권을 행사하였고, 1273년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여 교황 그레고리오10세(Gregorius PP. X, 1210~1276, 재위1271~1276)를 수행한다. 1277년 교황 요한21세(Ioannes PP. XXI, )의 선종으로 열린 콘클라베에서 6개월간의 접전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는 인물이다. 신성로마제국 로마왕(독일왕) 루돌프1세와의 협약으로 영토를 획득하고 외국인들에게는 공직에 앉는 것을 금지하는등 행보를 보인다. 

 

성직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34세이던 1244년 5월 28일, 교황 인노첸시오4세(Innocentius PP. IV, 1180~1254, 재위1243~1254)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으로 임명되기 이전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사제, 주교서품을 언제하였는지 어디에서 공부하였는지 알 수 없다. 추기경 서임 이후 교황특사로서 프랑스, 사비나, 피렌체, 비테르보등에서 외교임무를 맡고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10세(Gregorius PP. X, 1210~1276, 재위1271~1276)가 주최한 리옹 공의회에도 참석한다. 교황으로 선출되기까지 33년동안 7회의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투표권을 행사한 이력도 있다. 

 

1277년 콘클라베

1277년 5월 20일, 교황 요한21세(Ioannes PP. XXI, 1215~1277, 재위1276~1277)가 선종하여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당시 콘클라베는 6개월(1277.05.30~1277.11.25)이라는 긴 기간동안 실시되었는데, 추기경 선거인단이 불과7명으로 카톨릭 역사상 가장 적은 추기경단규모를 기록하는데 이는 1276년 한 해동안 4명의 교황(184대 교황 그레고리오10세, 185대 교황 인노첸시오5세, 186대 교황 하드리아노5세, 187대 교황 요한21세)이 있었던 만큼 짧은 재위기간을 가진 교황들이였는데 추기경을 임명하기도 전에 선종해버려서 나타난 결과였다. 그렇게 7명의 추기경들은 3명의 프랑스 앙주 가문 출신 샤를 당주(시칠리아 카를로1세)를 지지하는 프랑스 추기경들과 샤를 당주를 반대하는 로마 출신 3명의 추기경들로 나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1명의 추기경까지 매우 균등한 관계로 인해 6개월간의 논의 끝에 다달은 결론은 추기경단중 67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조반니 추기경은 교황 선출 후 교황명을 니콜라오(Nicholaus)로 짓고 니콜라오3세로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신성로마제국 루돌프1세

6개월간의 긴 콘클라베를 거쳐 교황이 된 니콜라오3세는 교황령을 재정비하여 카톨릭 교회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로마 원로원에 직접 교황의 권리를 주장하여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다지고자 하는데 이는, 3개의 공국인 남부 나폴리와 동북부 롬바르디아, 서북부 토스카나를 왕국으로 승격시켜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의 안전을 더욱 확고하게 보장받음과 동시에 세 왕국으로부터 나오는 이득까지 철저히 계산된 목표로서 이러한 목표를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로마왕(독일왕)이던 루돌프1세(Rudolf I, 1218~1291, 로마왕재위1273~1291)와 협상한다. 이는 로마왕(독일왕)이였던 루돌프1세는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하기위해서는 로마 교황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치뤄야 정식 황제가 될 수 있었기에 루돌프1세는 교황이 요구한 3개국의 왕국 승격과 더불어 십자군 원정까지 약속해주는 조건으로 루돌프1세를 정식 로마왕(독일왕)으로 승인하여 1278년 5월 최종적으로 협상이 타결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선제후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 어떻게든 황제 대관식을 막기위해 제후들간 연맹하여 루돌프1세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해 정식 황제가 되지 못한채 사망한다. 

 

II. 외국인 공직 금지

1278년 7월 18일, 니콜라오3세는 헌법 'Fundamenta militantis ecclesiae'를 발표함으로서 교황령 외부 외국인이 교황령 내 공직에 앉는 것을 금지하고 로마 시민의 선거권을 침해하지 않게 하며 로마 원로원 의원에도 외국인이 앉을 수 없음을 부여한다. 이 헌법이 공표되고 난 뒤 바로 1265년 교황 클레멘스4세(Clemens PP. IV, ?~1268, 재위1265~1268)에 의해 로마 원로원으로 있던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샤를 당주, Carlo I, 1226~1285, 재위1266~1285)의 원로원직을 사임하게끔 한다. 

 

III.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니콜라오3세의 부친 마테오 로소 오르시니(Matteo Rosso Orsini, 1178~1246)는 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 1181~1226)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프란치스코회의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 특히 예전부터 멸시받던 한센병(문둥병)환자들을 돌보는데 주력하는 청빈한 삶을 추구했던 것에 니콜라오3세역시 프란치스코회에 관심이 각별했다고 한다. 짧은 3년간의 재위기간동안 프란치스코회에 관련된 칙서와 서적이 160편이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관심과는 별개로 교황 스스로 족벌주의 노선을 택해 친척 3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행동을 보인다. 

 

선종

1280년 8월 22일, 70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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