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호노리오4세

Mintaka5 2025. 6. 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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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자코모 사벨리(Giacomo Savelli)

190대 교황 호노리오4세(Honorius PP. IV, 1210~1287, 재위1285~1287)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189대 교황 190대 교황 191대 교황
출신 프랑스, 투르 교황령, 로마 교황령, 아스콜리
명칭 마르티노4세
Martinus PP. IV
호노리오4세
Honorius PP. IV
니콜라오4세
Nicholaus PP. IV
생몰년도 1210.xx.xx ~ 1285.03.28 1210.xx.xx ~ 1287.04.03 1227.09.03 ~ 1292.04.04
콘클라베기간 5개월 3일
(1280.09.22~1281.02.22)
2일
(1285.04.01~1285.04.02)
10개월 25일
(1287.04.04~1288.02.22)
재위 1281.02.22 ~ 1285.03.28 1285.04.02 ~ 1287.04.03 1288.02.22 ~ 1292.04.04

190대 교황 호노리오4세 초상화
교황 호노리오4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10년 교황령 로마(Roma)에서 아버지 루카 사벨리(Luca Savelli, 1190~1266)와 어머니 조반나 알도브란데스키(Giovanna Aldobrandeschi, 119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90대 교황으로, 일찍이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한뒤 사제가되어 사목활동을 이어나가다가 1261년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된 이후 1274년 리옹 공의회, 1277년 부제급 추기경 단장, 추기경 재직동안 9회의 콘클라베에 참여하여 투표권을 행사한 인물이다. 1285년 교황 마르티노4세(Martinus PP. IV, 1210~1285, 재위1281~1285)선종이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고, 2년간(1285~1287)의 짧은 재위기간동안 교황청 내, 외적으로 평화를 이룩하고 당시 복잡한 유럽정세에서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 개선과 1282년 3월에 시칠리아에서 벌어졌던 시칠리아 만종사건으로 인한 대혼란을 중재하고 평화관계를 이룩하는데 앞장섰던 교황이다. 

 

성직 

부유한 사벨리 가문 출신으로 자코모는 일찍이 프랑스에 유학하여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어 사목활동을 이어가다가 1261년 교황 우르바노4세(Urbanus PP. IV, 1195~1264, 재위1261~1264)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고 동시에 교황청 장관겸 교황군 대장으로 임명되면서 교황령 방위에 대한 책무까지 다하게 된다. 이후 1274년 그레고리오10세(Gregorius PP. X, 1210~1276, 재위1271~1276)에 의해 개최되는 리옹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동방 교회 추기경들과의 화합을 주선한 추기경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1285년 콘클라베

1285년 3월 28일, 교황 마르티노4세(Martinus PP. IV, 1210~1285, 재위1281~1285)가 75세의 나이로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마르티노4세가 선종한지 5일이 지난 1285년 4월 1일 콘클라베가 열리고 총1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15명이 참여하고 3명이 불참한 상태(타 국가 교황 특사로 인한 불참)로 진행된다. 페루자에서 선종한 마르티노4세로 인해 콘클라베는 페루자 주교 관저에서 진행되었고 두번째날에 자코모 사벨리 추기경에게 표가 몰리면서 교황으로 선출되고 자코모 추기경이 교황직을 수락하여 호노리오4세로 명명하고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초기

호노리오4세는 1285년 즉위한 이후 특유의 평화 정책을 사용함으로서 재위한 2년간 교황령 내 수년간 외부로의 압력, 충돌과 더불어 내적인 문제까지 없던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II. 신성로마황제

1268년 10월 29일,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최후 당주인 콘라딘(Konradin, 1252~1268, 재위1254~1268)이 처형됨을 끝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하고 난 이후 이미 콘라딘의 아버지인 로마왕 콘라트4세(Konrad IV, 1228~1254, 로마왕재위1237~1254, 시칠리아재위1250~1254, 예루살렘재위1228~1254)가 사망하고 난 이후 정통황제없이 대립군주들로 난잡해지는 대공위시대(1254~1273)로 인해 신성로마제국 황권이 추락하여 교황의 권위에 덤빌 수 없을거라 여겼던 교황 알렉산데르4세(Alexander PP. IV, 1199~1261, 재위1254~1261)는 가장 큰 위협거리가 사라지면서 반겼지만 이후 교황들은 점점 막장으로 치닫던 신성로마제국령들이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리면서 교황들도 점점 이들의 구심점인 황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273년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를 루돌프1세()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게함으로서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이 이후에 즉위한 호노리오4세는 전임 교황 마르티노4세가 이들에게 취했던 것처럼 온건정책을 따르는데, 이미 분열기를 겪었던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287년 3월 뷔르츠부르크 공의회()에서 교황의 간섭을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마찰이 일어나지만 황제 루돌프1세가 교황 특사들을 보호함으로서 일단 표면적으로 융화정책은 실패하지만, 루돌프1세는 이전에 황제로 즉위할 때 직접 황제관을 씌워준 교황 그레고리오10세(Gregorius PP. X, 1210~1276, 재위1271~1276)와 맺은 협정을 준수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교황의 권위를 인정해 줌으로서 두 국가 사이에 안정을 되찾게 된다. 

 

III. 시칠리아 문제

1282년 3월 31일에 벌어진 시칠리아 만종사건()으로 인해 시칠리아 전역에 걸쳐 앙주 왕조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여 봉기로 발전하게 되면서 2천여명에 달하는 프랑스인들이학살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교황 마르티노4세(Martinus PP. IV, 1210~1285, 재위1281~1285)는 시칠리아와 시칠리아 군주 아라곤의 페로3세(Pero III, 1239~1285, 아라곤재위1276~1285, 시칠리아재위1282~1285)를 파문시키고 시칠리아 왕국을 프랑스 왕 필리프3세(Philippe III, 1245~1285, 재위1270~1285)의 아들인 샤를 드 발루아(Charles de Valois, 1270~1325, 발루아백작재위1285~1325아라곤섭정재위1284~1295)를 새 아라곤 왕으로 선포한 뒤 난장판이 된 시칠리아를 수복하기위해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와 협동하게 된다. 호노리오4세가 즉위한 이후 시칠리아는 1285년 1월 7일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샤를 당주, 1226~1285, 재위1266~1285)가 암살당하면서 평화를 원했던 호노리오4세는 이들에게 불이익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이들이 폭발하게 된 근본적 원인인 앙주 가문의 폭정에도 찬동하지 않으면서 혼란이 지속되게 된다. 이후 1285년 11월 페로3세가 사망하고 여러 인물들이 왕위를 주장함에 따라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는데, 호노리오4세는 이들 모두를 우선 인정하지 않고 상황경과를 지켜보는데 이 상황을 두고보다 못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1세(Edward I, 1239~1307, 재위1272~1307)의 중재로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이루게 된다.  

 

선종

1287년 4월 3일, 77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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