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마르티노4세

Mintaka5 2025. 6. 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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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시몽 드 브리옹(Simon de Brion)

189대 교황 마르티노4세(Martinus PP. IV, 1210~1285, 재위1281~1285)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188대 교황 189대 교황 190대 교황
출신 교황령, 로마 프랑스, 투르 교황령, 로마
명칭 니콜라오3세
Nicholaus PP. III
마르티노4세
Martinus PP. IV
호노리오4세
Honorius PP. IV
생몰년도 1210.xx.xx ~ 1280.08.22 1210.xx.xx ~ 1285.03.28 1210.xx.xx ~ 1287.04.03
콘클라베기간 6개월
(1277.05.30~1277.11.25)
5개월 3일
(1280.09.22~1281.02.22)
2일
(1285.04.01~1285.04.02)
재위 1277.11.25 ~ 1280.08.22 1281.02.22 ~ 1285.03.28 1285.04.02 ~ 1287.04.03

189대 교황 마르티노4세 초상화
교황 마르티노4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10년, 프랑스 왕국 투르(Tour)에서 아버지 장 드 브리옹(Jean de Brion, ?~?)와 어머니 알베르타 드 펠로지(Alberta de Pelozi,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89대 교황으로 프랑스 출신인 교황으로 파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다음 볼로냐, 파도바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사제로서 활동하고 특히 프랑스 출신인만큼 프랑스 왕 루이9세의 추천을 받고 이후 시칠리아 왕이 되는 샤를 당주(카를로1세)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1280년 교황 니콜라오3세 선종으로 열린 콘클라베에서 총5개월간의 콘클라베기간을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는 인물이다. 콘클라베가 장기화되는 시점에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가 주교궁에서 봉기를 일으키는등 위협을 가하면서 추기경들의 뜻이 브리옹 추기경에게 몰리면서 선출되었던 만큼 즉위 이후 카를로1세를 중심으로 한 시칠리아쪽으로 정책을 펼쳤고, 시칠리아 왕국 국민들에게 과도한 세금부과 수탈을 일삼으면서 분노를 키우다가 1282년 3월, 시칠리아 만종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성직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이탈리아 반도로 가서 파도바,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성직활동을 이어가다가 1260년 프랑스 왕 루이9세(Louis IX 'Saint Louis', 1214~1270, 재위1226~1270)의 추천으로 고향 투르 생 마르탱(Saint Martin)대성당 회계원으로 임명된 후 1280년까지 20년간 줄곧 이곳에서 지낸다. 1261년 12월, 교황 우르바노4세(Urbanus PP. IV, 1195~1264, 재위1261~1264)로부터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고 이후엔 교황 특사로서 카톨릭 국가들을 다니면서 외교임무를 수행한다. 

 

1280-1281년 콘클라베

1280년 8월 22일, 교황 니콜라오3세(Nicholaus PP. III, 1210~1280, 재위1277~1280)가 선종하고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총14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진행되는 콘클라베는 1280년 9월 22일 열리게 되어 1281년 2월 22일까지 5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진행되는데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의 파벌로 분열된 콘클라베는 점점 과열양상을 띠는데 1281년 초 콘클라베가 진행중일때 오르시니 가문 두 추기경 조르다노, 마테오 추기경이 콘클라베 도중에 끌려나가는등 막장 콘클라베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러한 콘클라베 진행 방해로 교황 선출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있었는데 결국 1281년 2월 22일 프랑스 앙주 가문 출신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Carlo I, 1226~1285, 재위1266~1282)가 군대를 이끌고 콘클라베가 열리던 비테르보 주교궁으로 쳐들어와서 주민들을 학살하는등 추기경을 압박하기에 이르자 추기경단들은 우선적으로 카를로1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 출신 추기경인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하게 된다.  

 

교황

1281년 2월 22일 선출되어 즉위한 교황 마르티노4세는 프랑스 앙주가문 출신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의 지지를 받는데 당시 로마인들은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에서 즉위할 뜻을 밝힌 마르티노4세를 허락하지않게 되고 오르비에토(Orvieto, 현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테르니도)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4년간의 재위기간동안 로마땅을 밟지못한 교황이 된다. 마르티노4세는 즉위 직후 전임 교황 니콜라오3세가 임명했던 친족들을 모두 보직해임시키고 카를로1세를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시키고, 친 프랑스성향으로 반발한 주변 군주들의 공격을 모두 제압하는데 심지어는 1281년 4월 10일엔 동로마 황제 미하일8세 팔레올로고스(Michael VIII Palaiologos, 1224~1282, 재위1261~1282)를 파문시켜버리고 카를로1세로 하여금 동로마제국 침략 권한을 부여해버린다. 이로인해 콘스탄티노플 십자군이 발동되고 카를로1세는 십자군 원정을 위한 군사, 재정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이 십자군은 시작전부터 시칠이아 국민들에게 평소30배에 달하는 세금부과와 함께 수탈까지 일삼으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점점 가중되는데 당시 시칠리아 왕국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인으로서 정치 참여길이 막혔던 시칠리아 국민들은 1282년 3월 그 분노가 폭발하여 '시칠리아 만종사건(1282.03.31)'이 발발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시칠리아 왕 카를로1세는 폐위되고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분노한 시칠리아 국민들은 아라곤 왕 페로3세(Pero III, 1239~1285, 아라곤재위1276~1285, 시칠리아재위1282~1285)를 새 왕으로 선출시키지만 교황 마르티노4세는 이에 반하여 시칠리아를 프랑스령으로 계속 남기려고하는 시도를 하면서 페로3세를 파문시키고 페로3세를 상대로 십자군을 소집하지만 다른 유럽 카톨릭 국가 군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어버리면서 결국 프랑스는 시칠리아 왕국을 잃게 된다.  

 

선종

1285년 3월 28일, 75세의 나이로 페루자에서 선종한다. 선종 후 콘클라베는 페루자에서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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