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첼레스티노5세

Mintaka5 2025. 5. 31. 13:25
반응형

본명 : 피에트로 안젤레리오 다 모로네(Pietro Angelerio da Morrone)

192대 교황 첼레스티노5세(Caelestinus PP. V, 1215~1296, 재위1294)

 전임 교황당시 재직 교황후임 교황
직위191대 교황192대 교황193대 교황
출신교황령, 아스콜리시칠리아, 이제르니아교황령, 아나니
명칭니콜라오4세
Nicholaus PP. IV
첼레스티노5세
Caelestinus PP. V
보니파시오8세
Bonifacius PP. VIII
생몰년도1227.09.30 ~ 1288.02.221215.xx.xx ~ 1296.05.191230.xx.xx ~ 1303.10.11
콘클라베기간10개월 25일
(1287.04.04~1288.02.22)
2년 3개월
(1292.04.05~1294.07.05)
2일
(1294.12.23~1294.12.24)
재위1288.02.22 ~ 1292.04.041294.07.05 ~ 1294.12.131294.12.24 ~ 1303.10.11
192대 교황 첼레스티노5세 초상화
첼레스티노5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15년, 시칠리아 이제르니아(Isernia)에서 아버지 안젤로 안젤레리오(Angelo Angelerio, ?~1230)와 어머니 마리아 레오네(Maria Leone,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92대 교황으로, 1292년 교황 니콜라오4세가 선종한 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2년 3개월이라는 긴 기간동안 투표를 진행한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는 인물이다. 어린시절부터 금욕, 고독한 생활에 익숙하였고 모로네 동굴에 스스로 들어가 엄격한 수련생활로 이후 많은 성직자들로부터 훌륭한 수도자로서의 평판을 받아 자신이 설립했던 새로운 수도회를 지키기 위해 1273년 공의회가 열리는 리옹에 달려가 교황 그레고리오10세를 알현해 설득하여 수도회를 지켜내기도 한다. 그러나 교황으로 즉위한 이후 행정경험 전무에 기본적인 능력마저 보여주지 못해 주변인들로부터 실망을 안기고 교황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면서 즉위5개월만에 교황직을 사임하며 교황청의 부담을 덜고자 했던 인물이다.
 

성직

어린 시절, 파이폴리 산타 마리아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수사로서 수련을 받고 특히 금욕적인 생활과 고독한 생활을 좋아한 탓에 1239년 모로네 산 동굴에 들어가 남들보다 엄격한 수련생활을 하였고, 1240년 로마로 이주해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사제 서품을 받고, 1244년엔 베네딕토회 분파로 인정되는 수도회를 직접 설립하는데 새로운 수도회가 형성됨에 따라 자신이 고행을 해왔던 흔적들을 통해 규율을 제정하고 성장시킴에 따라 1264년 교황 우르바노4세(Urbanus PP. IV, 1195~1264, 재위1261~1264)에 의해 인가가 되지만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10세(Gregorius PP. X, 1210~1276, 재위1271~1276)가 프랑스 왕국 리옹(Lyon)에서 제2차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여 수도회 설립을 금지할 것을 공표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피에트로는 리옹으로 당장에 가서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를 지키기 위해 교황을 설득시키는데, 그간의 고행과 엄격한 수도생활을 거쳐오면서 주변 성직자들로부터 훌륭한 평판을 가지고 있던 피에트로였던지라 수도회를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1273년 교황 그레고리오10세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게 되면서 수도회를 지켜내게 되며 이 수도회는 교황이 된 이후 '첼레스티노회'로 명명되게 된다. 
 

1292~1294년 콘클라베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4세(Nicholaus PP. IV, 1227~1292, 재위1288~1292)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총12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이 로마에 집결하면서 1292년 4월 5일 콘클라베가 시작되는데, 당시 로마를 이끌던 두 대립가문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은 각각 파벌을 형성하면서 콘클라베에서 각자 주장을 펼치며 후보를 내놓지만, 당장에 12명이라는 적은 규모의 선거인단으로 2/3이상 받기위한 투표를 열흘넘게 진행하여도 결론이 나지 않게되면서 6월까지 미루는 것에도 모자라 이후 로마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중 한명인 추기경 장 숄레(Jean Cholet, ?~1293, 추기경임명1281)가 1293년 8월 2일 선종하면서 또 콘클라베가 미뤄진다. 이런 콘클라베 도중에도 로마내에서는 콜론나가문과 오르시니가문의 충돌이 지속되면서 무정부상태가 지속되는데 콘클라베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고 계속해서 투표를 진행하여 1294년이 되어도 결론이 나지 않자 최종적으로 1294년 7월 5일 피에트로 안젤레리오 다 모로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2년 3개월간의 긴 콘클라베가 종료된다. 교황명은 첼레스티노로 명명되고 첼레스티노5세로서 즉위하게 된다. 
 

교황

첼레스티노5세는 행정 실무 경험이 전무했던 만큼 교황청 행정을 혼란 상태로 몰아놓고, 특정 인물에게 인사가 편중되는 실수를 저지름과 동시에 칙서 발표에서도 너무 단순한 내용으로 인해 무능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리면서 교황으로서의 권위가 순식간에 추락해버린다. 첼레스티노5세는 즉위 초기에는 이전의 고행과 엄격한 수련등으로 훌륭한 수행자로서의 인식이 팽배하여 주변의 기대감이 컸지만 이내 그 기대는 실망감으로 바뀌어 버리면서, 스스로가 교황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서 수석 사제급 추기경 베네데토 카에타니(교황 보니파시오8세와 동명이인이자 조카, Benedetto Caetani, 1250?~1296)와 교황직 사임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고 최종적으로 즉위한지 5개월이 지난 시점이였던 1294년 12월 13일 공식적으로 사임을 선언하면서 교황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첼레스티노5세 사임 이후 10일이 지난 시점인 1294년 12월 23일 콘클라베가 다시 열리면서 이번엔 2일만에 결론이 나고 베네데토 가에타니 추기경(앞서 말한 수석 사제급 추기경 베네데토 카에타니와 동명이인이자 삼촌인 보니파시오8세)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보니파시오8세로 즉위하게 된다.
 

선종

첼레스티노5세는 1294년 12월 13일 교황직 사임 이후 초년에 했던 동굴로 들어가 수련생활을 하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복잡한 교황령 정치구도 속에서 후임 교황 보니파시오8세에 의해 푸모네 성(Fumone Palace)에 감금되고 이곳에서 1296년 5월 19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반응형

'로마 교황 > 101대~200대 교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노리오4세  (0) 2025.06.01
니콜라오4세  (0) 2025.05.31
베네딕토11세  (0) 2025.05.30
클레멘스5세  (0) 2025.05.29
요한22세  (0) 2025.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