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펠리체 페레티 몬탈토(Felice Peretti Montalto)
227대 교황 식스토5세(Sixtus PP. V, 1521~1590, 재위1585~1590)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226대 교황 | 227대 교황 | 228대 교황 |
| 출신 | 교황령, 볼로냐 | 교황령, 그로탐마레 | 교황령, 로마 |
| 명칭 | 그레고리오13세 Gregorius PP. XIII |
식스토5세 Sixtus PP. V |
우르바노7세 Urbanus PP. VII |
| 생몰년도 | 1502.01.07 ~ 1585.04.10 | 1521.12.13 ~ 1590.08.27 | 1521.08.04 ~ 1590.09.27 |
| 콘클라베기간 | 2일 (1572.05.12~1572.05.13) |
4일 (1585.04.21~1585.04.24) |
9일 (1590.09.07~1590.09.15) |
| 재위 | 1572.05.13 ~ 1585.04.10 | 1585.04.24 ~ 1590.08.27 | 1590.09.15 ~ 1590.09.27 |

출생
1521년 12월 13일, 교황령 그로탐마레(Grottammare)에서 아버지 페레토 디 몬탈토(Peretto di Montalto, ?~1565)와 어머니 마리안나 다 프론틸로(Mariana da Frontillo)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27대 교황으로, 어린시절 매우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12세가 되었을 1533년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하고 1535년 수사가 된다. 이후 학업을 마치고 1547년 사제 서품을 받고 1548년엔 페르모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특유의 뛰어난 웅변능력으로 설교를 정말 잘했다고 하는데 1552년 프란치스코회 총장 로돌포 피오 다 카르피(Rodolpo Pio da Carpi, 1500~1564)추기경의 눈에 띄게 되며 덩달아 여러 추기경들에게도 눈에 띄게 되면서 교황령 로마에 와서 직책을 맡게 되는데, 1565년 교황 비오4세(Pius PP. IV, 1499~1565, 재위1559~1565)가 펠리체를 우고 본콤파니(미래의 교황 그레고리오13세, Ugo Boncompagni, 1502~1585, 재위1572~1585)추기경이 위원장으로 있던 종교재판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해 톨레도 대주교 바르톨로메 카란사(Bartolomé Carranza, 1503~1576)를 조사하는데 우고 본콤파니 추기경과 트러블이 생기면서 대립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적대관계로 남게 된다. 특유의 강직한 성격과 엄격함을 갖춘 펠리체는 교황청 자문위원, 대학 교수, 프란치스코회 총대리등에 임명되고 1570년엔 교황 비오5세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받게 되지만 비오5세의 후임교황이 되는 그레고리오13세가 이전에 대립하던 우고 본콤파니 추기경이였기에 교황령 공직에서 물러나 은퇴한다. 거의 반강제로 은퇴한 후 13년간 신학 공부에 매진하다가 1585년 그레고리오13세가 선종하면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식스토5세로 명명한 후 즉위한다.
성직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1533년 12세의 나이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게 되면서 1547년 26세의 나이로 사제가 되면서 성직생활이 시작된다. 펠리체는 교육과정부터 웅변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는데, 이러한 능력에 따라 1552년 프란치스코회 총장 로돌포 피오 다 카르피(Rodolpo Pio da Carpi, 1500~1564)추기경과 잔 피에트로 카라파 추기경(미래의 교황 바오로4세, Gian Pietro Carafa, 1476~1559, 재위1555~1559), 안토니오 기슬리에리(미래의 교황 비오5세, Antonio Ghislieri, 1504~1572, 재위1566~1572)추기경의 눈에 띄게 되며 교황령 로마에 와서 직책을 맡게 되면서 설교를 맡게 되는데, 사순절 설교까지 능력을 발휘한 덕에 특히 미래의 비오5세가 되는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추기경이 펠리체를 수년간 곁에 두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베네치아 대학 총장, 종교재판소 재판관, 교황청 신앙교리성 자문위원, 라 사피엔자 대학 교수, 프란치스코회 사도대리등의 중책을 맡게 된다.
그러나1565년, 한 추기경과 20년에 걸친 악연이 시작되는데, 교황 비오4세(Pius PP. IV, 1499~1565, 재위1559~1565)는 펠리체에게 이단 혐의가 있는 톨레도 대주교인 바르톨로메 카란사(Bartolomé Carranza, 1503~1576)를 재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파견하여 종교재판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다. 이 위원회 위원장은 비오5세의 후임 교황(그레고리오13세)이 되는 우고 본콤파니 추기경(Ugo Boncompagni, 1502~1585, 재위1572~1585)이였는데, 펠리체는 위원회에서 우고 추기경과 같이 일하다가 오해가 붉어지면서 해결되지않고 오해가 점점 커짐에따라 강직한 성격을 가졌던 펠리체가 강한 반감을 가져 우고 추기경 역시 펠리체에게 점점 반감을 가지게 된다. 1566년 비오5세(Pius PP. V, 1504~1572, 재위1566~1572)가 즉위하고 바로 펠리체를 주교로 임명하고 1570년엔 추기경에 서임시킨다.
1572년 콘클라베
I. 악연이 교황으로 선출
펠리체와 비슷한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교황 비오5세가 1572년 선종함에 따라 콘클라베가 열린다. 펠리체 페레티 몬탈토 추기경 역시 이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교황 선출을 위한 투표를 하게 되는데, 총66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53명의 추기경이 참석한 콘클라베는 1572년 5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당시 강력한 교황 후보였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1520~1589)추기경과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미래의 교황 레오11세, Leo PP. XI 'Alessandro Ottaviano de' Medici', 1535~1605, 재위1605)추기경,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 1538~1584)추기경, 우고 본콤파니(Ugo Boncompagni, 미래의 교황 그레고리오13세)추기경등 상당히 쟁쟁한 상대들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당시 유럽의 판세를 흔들던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세력균형을 위해 눈치싸움이 한창 진행되었었다. 그렇게 추기경들끼리 협의가 우고 본콤파니 추기경을 선출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어 우고 추기경이 콘클라베 시작 이틀만에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명은 교황 그레고리오1세(Gregorius PP. I, 540~604, 재위590~604)를 기리기 위해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으로 명명해 그레고리오13세로 짓고 즉위하게 된다.
II. 강제 은퇴
1565년 종교 재판 위원회에 속해있을 때부터 펠리체와 우고 본콤파니 추기경간의 마찰이 시작되어 결국 우고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13세로 즉위하게 되자 펠리체 추기경은 강제적으로 교황령 공직에서 물러나 사실상 은퇴를 하고 빌라 몬탈토(Villa Montalto)라는 저택에서 13년이라는 시간을 신학 연구와 공부, 서적 출간등으로 보내게 된다.
1585년 콘클라베
1585년 20여년간 서로 대립해오던 교황 그레고리오13세(Gregorius PP. XIII, 1502~1585, 재위1572~1585)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열린다. 총60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39명이 참석한 콘클라베로 상당히 참석률이 저조한 콘클라베로 이름나있다. 그도 그럴것이 그레고리오13세가 임명했던 추기경 30명중 14명이 펠리체 추기경을 의식하여 불참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1585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진행된 콘클라베에서 만장일치의 득표로 펠리체 페레티 몬탈토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명은 식스토5세(Sixtus PP. V, 1521~1590, 재위1585~1590)로 명명되어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강력한 변화 추구
식스토5세는 즉위 이후 교황령 내 질서를 바로잡기위해 특유의 강직함과 엄격함으로 무자비할정도로 행정을 수행해 나간다. 로비식으로 성직자들의 배후를 지원하던 귀족들을 숙청하여 교황령 내 정치세력을 단번에 바로잡아 질서를 찾게 된다. 교황령 내 정치가 안정되게 되면서 교황은 재정 문제를 손보기시작하는데, 교황령 내 공직자들의 수를 줄이고 새로운 형태의 세금을 부여하여 거의 수탈하듯이 돈을 거둬서 재정을 축적하여 당시 혼란스러웠던 유럽의 상황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기에 이른다. 이 다음에는 성직자들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는데, 1586년 12월 사도헌장 'Postquam verus'를 공표하여 추기경단을 개혁하는데 그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 내용 | 유효 기간 | |
| I | 추기경단은 70인을 초과할 수 없다 | 1586 ~ 1958. 1958년 교황 요한23세에 의해 수정하기까지 유지 |
| II | 혼외 관계로 태어난 사람은 추기경이 될 수 없다 | 현재도 유지 |
| III | 자녀를 둔 사람은 추기경이 될 수 없다 | |
| IV | 추기경에 서임되려면 22세 이상이 되어야 하고, 성직위를 받은 상태여야 한다 |
또한 식스토5세는 교황령 로마 내 교황청 기구를 재조직 시키고 교황령 내 공문서를 인쇄하기위해 인쇄소를 설립하기도 한다.
II. 외교
식스토5세는 오스만 제국 전성기를 이끈 파디샤 슐레이만1세(Suleiman I, 1494~1566, 재위1520~1566)이후 몰락하는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 위그노전쟁(1562~1598)막바지 세 앙리들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해 교황 자신의 조카를 새 프랑스 왕으로 옹립시키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개신교가 유럽 전체에퍼지던 상황에 프랑스는 더욱 빠르게 퍼짐에 따라 조카를 왕위로 올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고 콘클라베때부터 강한 영향력을 피력하던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의 권위가 계속해서 높아짐에 따라 견제가 필요한 시점이였다. 훗날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여는 나바라 왕 앙리3세(미래의 앙리4세, 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를 파문시키고 카톨릭 동맹에 참여하지만 앙리3세에 의해 대패당하고 이에 펠리페2세에게까지 밀리는 형국을 보이게 되면서 본전을 찾기위해 유럽의 정치적 균형을 맞추려고 대사를 보내 협상을 선종할때까지 시도하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
선종
1590년 8월 27일 69세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