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비오6세

Mintaka5 2025. 5. 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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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반니 안젤로 브라스키(Giovanni Angelo Braschi)

250대 교황 비오6세(Pius PP. VI, 1717~1799, 재위1775~1799)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49대 교황 250대 교황 251대 교황
출신 교황령, 리미니 교황령, 체세나 교황령, 체세나
명칭 클레멘스14세
Clemens PP. XIV
비오6세
Pius PP. VI
비오7세
Pius PP. VII
생몰년도 1705.10.31 ~ 1774.09.22 1717.12.25 ~ 1799.08.29 1742.08.14 ~ 1823.08.20
콘클라베기간 3개월 4일
(1769.02.15~1769.05.19)
4개월 10일
(1774.10.05~1775.02.15)
3개월 15일
(1799.11.30~1800.03.14)
재위 1769.05.19 ~ 1774.09.22 1775.02.15 ~ 1799.08.29 1800.03.14 ~ 1823.08.20

비오6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17년 교황령 체세나(Cesena)에서 아버지 마르코 오렐리오 톰마소 브라스키(Marco Aurelio Tommaso Braschi, 1684~1758)와 어머니 안나 테레사 반디(Anna Teresa Bandi, 1690~173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50대 교황으로, 즉위내내 혼란속에서 살아갔던 교황이다. 비오6세 즉위당시 전임 교황 클레멘스14세(Clemens PP. XIV, 1705~1774, 재위1769~1774)에 의해 예수회가 해산되고 교황권이 바닥끝까지 떨어졌을 때 즉위한 교황으로서 여러 혼란스러운 상황들에 맞닥들이지만, 이후 더욱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내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탄압을 받는 불이익이 생기자 제1차 대프동맹(1792~1797)을 지지하여 프랑스를 안정시키고자 했지만 1796년부터 깜짝 등장한 나폴레옹(미래의 나폴레옹1세)으로 인하여 여러차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되는 굴욕을 맛보고 1798년 프랑스 원수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1815)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하고 교황권이 위협받을때도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버티다가 토스카나 지방으로 추방당하고 1799년 프랑스군에 의해 사실상 납치되어 프랑스로 끌려가서 프랑스 남부 발랑스(Balence)에서 82세로 선종한다. 

 

성직

1717년 크리스마스때 태어나 태어난지 이틀만에 유아세례를 받고 유년기에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체세나의 신학교에 들어가서 수학하고 1735년 18세의 나이에 체세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법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조반니는 외삼촌이였던 조반니 카를로 반디(Giovanni Carlo Bandi, 1709~1784)의 법학 지도를 받으며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가다가 나폴리 출신인 페라라 대주교 토마소 루포(Tommaso Ruffo, 1663~1753)추기경의 비서로 첫 경력이 시작되게 된다. 1740년 교황 클레멘스12세(Clemens PP. XII, 1652~1740, 재위1730~1740)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 조반니도 토마소 루포 추기경의 비서로서 추기경의 콘클라베 참석으로 로마로 같이 가기도 한다. 그렇게 토마소 루포 추기경의 비서로서 임무를 잘 수행하여 이를 인정받아 추기경으로부터 교황청 공직을 맡게 되면서 당시 교황 베네딕토14세(Benedictus PP. XIV, 1675~1758, 재위1740~1758)와 클레멘스13세(Clemens PP. XIII, 1693~1769, 재위1758~1769)의 치하에서 재정담당 부서에서 직책을 맡게 된다. 1746년 교황 베네딕토14세가 교황령과 나폴리 부르봉 파르마 왕가 사이에 주교 재판권 분쟁 해결건을 위해 조반니를 나폴리 왕국에 파견보낸다. 그렇게 나폴리왕국에 가서 나폴리 대주교 주세페 스피넬리(Giuseppe Spinelli, 1694~1763)추기경의 사임건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753년 토마소 루포 추기경이 90세의 나이로 선종하고 조반니를 눈여겨보고있던 교황 베네딕토14세가 조반니를 자신의 비서로 임명하고 총애를 받는데, 성직자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1758년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성직 생활이 시작되게 된다. 1758년 사제 서품 이후 교구장, 추기경 비서관, 교황령 재무관등을 거쳐 1773년 추기경에 서임되기에 이른다. 

 

1774년 콘클라베

1774년 교황 클레멘스14세(Clemens PP. XIV, 1705~1774, 재위1769~1774)가 선종하고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린다. 4개월(1774.10.05~1775.02.15)에 걸친 콘클라베는 64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9명이 불참한 55명이 투표에 참석해 투표를 하였고, 후보로는 보수파에 속했던 마르칸토니오 콜론나(Marcantonio Colonna, 1724~1793)추기경이 후보에 올랐지만 2/3이상의 득표를 받지 못했고 더욱이 예수회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이어가던 두 파(친 예수회 프랑스, 독일 추기경단 & 반 예수회 스페인, 포르투갈 추기경단)는 장기간 이어진 콘클라베에서 결론이 나지않자, 보수파중 온건성향을 보였고 조용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던 조반니 안젤로 브라스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황명은 비오5세(Pius PP. V, 1504~1572, 재위1566~1572)의 이름을 따서 비오6세로 명명한 후 즉위한다. 

 

교황

비오6세는 1775년 즉위한 이후 전임 교황 클레멘스14세(Clemens PP. XIV, 1705~1774, 재위1769~1774)가 유럽 열강들의 팽창정책에 반대하던 예수회해체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결국 버티다 못한 교황이 1773년 칙서(Dominus ac Redemptor)를 통해 예수회를 해산하는 발표를 함으로서 1만여명의 예수회 회원들이 강제로 추방당하고 감금당하는등 탄압이 이어지면서 로마 약탈이 자행되었을 때인 1527년 당시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이후 약250년만에 교황권이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만큼 재위기간동안 유럽국가와 교황령간의 대립이 점점 심해지면서 점점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2세(Joseph II, 1741~1790, 재위1765~1790)는 1781년 개신교에 대한 관용령을 발표하여 나름의 종교의 자유를 국민에게 부여하면서 비오6세가 한달간 신성로마황제가 머무르는 빈에 한달간 머무르며 교회법 개혁과 문제되는 조항의 철회를 요청하고자했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이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는데, 1789년 7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내 카톨릭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면서 수천명에 달하는 프랑스 카톨릭 신자들이 교황령으로 피난을오고 1790년 프랑스는 공화국을 선포함과동시에 카톨릭을 분리하기위한 조치가 이어지면서 프랑스 내 카톨릭 교회 국유화, 국교 폐지등의 큰 사건들이 터진다. 

그러나 비오6세는 1년이 지나서인 1791년 4월 칙령을 통해 교황을 통한 주교임명은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더욱이 프랑스 내 교황옹호자들이 프랑스 아비뇽 교황궁에서 처형을 당하는등 극단적인 상황이 이뤄지는데 이 사건을글라시에르 학살(1791.10.16~1791.10.17)이라고 한다. 두 국가가 극단으로 치닫으면서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버렸고 심지어 프랑스 혁명군은 1791년 11월 교황령 영토 일부를 점령해 프랑스 영토에 합병시키기까지 한다. 이후 혁명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카톨릭 탄압이 이루어지고 공화국에 충성하지 않는 성직자와 신자들 4만여명이 프랑스령 남미 가이아나로 추방당하기에 이른다. 1793년 1월엔 프랑스 왕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2)가 기요틴으로 처형당하고 이후로도 성직자들이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비오6세는 제1차 대프동맹을(1792~1797) 지지하였고 모든 유럽국가들이 프랑스에 공격을 퍼붓지만 1796년 프랑스 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미래의 나폴레옹1세) 장군이 깜짝 등장하게 되면서 갑작스레 이탈리아 반도로 군사를 보내 교황령까지 총구를 돌려 위협하기에 이르자 깜짝 놀란 교황 비오6세는 볼로냐 휴전 협정을 체결하는등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재침공한 나폴레옹군에 의해 톨렌티노 조약()을 통해 교황령 일부의 권리를 포기하고 배상금과 예술작품들이 약탈당한다. 

 

선종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을 1798년 초, 갑작스럽게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1815)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의 권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비오6세는 이를 거부하여 베르티에는 교황을 토스카나 지방으로 추방시키기에 이른다. 교황만 단독으로 격리시켜버림에 따라 교황령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행정이 일시중지되어버리는데, 이듬해1799년 프랑스군이 교황 비오6세를 기어이 포로로 사로잡아 프랑스까지 데리고 가게 되면서 1799년 프랑스 남부 발랑스(Balence)에서 감금되있던 상태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비오6세의 시신은 프랑스에서 별다른 장례절차없이 매장되었다가 1802년이 되어서야 후임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에 의해 로마로 돌아와서 카톨릭장으로 장례미사를 본 다음 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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