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비오11세

Mintaka5 2025. 4. 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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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킬레 암브로조 다미아노 라티(Achille Ambrogio Damiano Ratti)

259대 교황 비오11세(Pius PP. XI, 1857~1939, 재위1922~1939)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58대 교황 259대 교황 260대 교황
출신 샤르데냐 왕국, 제노바 오스트리아 제국령 밀라노현, 데시오 이탈리아 왕국, 로마
명칭 베네딕토15세
Benedictus PP. XV
비오11세
Pius PP. XI
비오12세
 Pius PP. XII
생몰년도 1854.11.21 ~ 1922.01.22 1857.05.31 ~ 1939.02.10 1876.03.02 ~ 1958.10.09
콘클라베기간 4일
(1914.08.31~1914.09.03)
5일
(1922.02.02~1922.02.06)
2일
(1939.03.01~1939.03.02)
재위 1914.09.03 ~ 1922.01.22 1922.02.06 ~ 1939.02.10 1939.03.02 ~ 1958.10.09

비오11세
비오11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57년 오스트리아 제국 밀라노현 데시오(Desio)에서 아버지 프란체스코 라티(Francesco Ratti, 1823~1881)와 어머니 테레사 갈리(Teresa Galli, 1832~1918)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59대 교황인 인물로, 1차 세계대전(1914.07.28~1918.11.11)이 끝나고 유럽이 혼란스러울 때 즉위하였는데 특히 파시즘과 나치즘이 대두되면서 상당히 경계를 했던 인물로 파시스트당 수장인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선종할때까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고 1933년 나치당 수장이 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여러 번 항의를 하고 서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 1879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성직생활을 하며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교회법,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파도바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1911년 교황 비오10세(Pius PP. X, 1835~1914, 재위1903~1914)의 제안을 받고 바티칸 도서관 부도서관장과 도서관장을 역임하다가 비오10세의 후임 교황이 되는 베네딕토15세(Benedictus PP. XV, 1854~1922, 재위1914~1922)가 라티에게 도서관장을 그만두고 외교관으로 임무를 맡겨 1차대전 종전 직후 독립한 폴란드 주재 교황 순시관으로 파견시킨다. 베네딕토15세는 교황 대사로 파견시킨 라티에게 1919년 주교로 서임시키고 교황 대사로 승격시키고 명의 대주교로 임명하게 된다. 라티는 1920년 소련이 폴란드에 군대를 보낼 때도 폴란드 사람들과 함께 하여 끝까지 계속 있고자 하여 폴란드와 소련과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는 것까지 불사할려고 하자 베네딕토15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스스로가 가교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내에서 공감을 얻지 못하고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1922년 베네딕토15세가 선종한 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11세로 즉위하게 된다.

 

초년

1867년 세베소 신학교에서 성직자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 프란체스코회 수도회, 밀라노 대신학교, 세베소 신학교등을 거치면서 1879년 로마에서 라파엘레 모나코 라 발레타(Raffaele Monaco La Valletta, 1827~1896, 추기경서임1884년) 추기경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게 된다. 학자에 가까운 스타일이였던 만큼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도서관에 거의 매일 하루종일 있을 정도로 열정적이여서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교회법, 신학등 3개의 분야에 걸쳐 박사 학위를 가지게 된다. 이후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아 후학들을 양성하면서도 학문을 닦다가 그의 학문능력을 높게 산 교황 레오13세(Leo PP. XIII, 1810~1903, 재위1878~1903)의 눈에 띄게 된다. 

 

성직

1879년 사제 서품을 받고 1882년 바르니(Barni) 대리 본당 사제로 임명되고 1907년 몬시뇰 칭호 수여와 함께 교황 비오10세(Pius PP. X, 1835~1914, 재위1903~1914)의 측근 성직자가 되고난 뒤 바티칸 부도서관장과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는데, 뛰어난 외교력을 가졌던 라티의 능력을 높게 산 교황 베네딕토15세(Benedictus PP. XV, 1854~1922, 재위1914~1922)로부터 폴란드 교황 순시관으로 파견되어 폴란드 국민들과 함께 하는데, 당시 폴란드는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 아래 놓여 여러차례 박해를 당하던 상태였는데 거기다가 공산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낸 볼셰비키 소련이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로 침공을 해오면서 이미 피신한 다른 국가 외교관과들과는 다르게 폴란드 국민과 함께 있기 위해 계속 남아있게 되고 더욱이 스스로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가교역할을 자처하면서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보이자 뛰어난 외교관을 잃고 싶지 않았던 교황 베네딕토15세가 라티를 말렸고 더욱이 교황청에서 성직자들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공표함에 따라 라티는 어쩔 수 없이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1922년 교황 베네딕토15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1922년 콘클라베

교황 베네딕토15세가 1922년 1월 폐렴으로 선종하고 콘클라베에 참석한 라티 추기경은 5일에 걸쳐 진행된 투표에서 60명(7명 불참으로 53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의 표를 2/3이상 얻어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11세로 명명한 뒤 즉위하게된다. 

 

교황

콘클라베로 1922년 즉위한 비오11세는 전임자의 정책을 거의 이어받아 나가면서 190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적 변화로 인해 직면한 교회의 변화수용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져 근대적 사상을 근절하고 동조하지 않게끔 하는 정책들을 폈다. 물론 새로운 신학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적인 가치를 새로운 신학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외교관으로서 오랫동안 능력을 보여온 비오11세는 1차대전이 끝나고 혼란이 온 1920년대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유럽을 어떻게 잘 개선시켜 화합을 이끌어내느냐가 주 목적이였는데 특히 오랜기간동안 이탈리아 정부와 대립을 해오던 교황청이였던지라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서 사실상 교황청을 바티칸 시국으로 독립시켜 주권 독립을 하게끔 합의를 이끌어 낸 교황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파시즘을 앞세운 무솔리니가 전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바티칸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는데 한술 더 떠서 1933년 독일을 휘어잡은 나치당과 수장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와 제국종교협약을 체결하고 각 국가간 교회의 자유, 종교적 교육, 활동등을 하게끔 하지만 점점 나치당이 반 카톨릭 성향으로 바뀜에도 모자라 전체주의적 사고로 유럽전체를 위협할만큼 세가 커지면서 히틀러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히틀러는 이러한 교황의 발표에 교회 폐쇄, 카톨릭 청년단체 회원 체포, 탄압등을 일삼게 되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기에 이른다. 

 

선종

1939년 2월, 비오11세는 1938년부터 상당히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81세의 고령으로 갑자기 선종해버리면서 안그래도 악화되었던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의 관계회복은 더욱 멀어져만 가는데, 선종 후 7개월 뒤 2차 세계대전(1939.09.01~1945.09.02)이 발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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