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최천택

Mintaka5 2025. 8. 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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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천택(崔天澤, 1897~1961)

 

 

출생

1897년 6월 1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부산부(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아버지 최차구(崔此球, ?~?)와 어머니 김신행(미상)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부산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일찍이 항일 투쟁에 투신하면서 부산공립상업학교 동기 박재혁, 김병태, 박홍규등과 함께 [동국역사]를 배포하는등으로 체포되기도 하고 비밀 결사단체인 [구세단]을 조직하기도 한다. 이후로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독립하기까지 50건이 넘게 체포, 구금되는등 활발하게 항일활동을 전개한다. 해방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부위원장, 민주중보 사장을 거치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인해 좌익계 인사로 분류되어버리며 고문을 받고 풀려난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퇴진과 함께 혁신동지총연맹 최고위원으로 활동, 5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 수립과 함께 다시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그해 11월 후유증으로 인해 부산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사망한다.   

 

초년

상대적으로 넉넉한 경제상황을 가졌던 부모 덕분에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숙부(최상훈, 통역관이자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사관학교 교관으로 활동)와 숙모(변봉금, 독립운동가)의 영향을 받아 어린나이에 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시절인 1912년, 일제의 정책으로 금서로 지정된 역사 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동기생인 박재혁(朴載赫, 1895~1921), 김병태(金餠泰, 1899~1946), 박홍규(?~?)등과 함께 자신의 집에 있던 등사기로 직접 찍어 다니던 상업학교는 물론 부산 지역 내에 있던 학교들에 동국역사를 배포하게 되면서 이에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 모두 체포되어버리지만 10여일 만에 풀려난 뒤 1913년 다시 동지들과 함께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결의함과 동시에 활동을 시작하지만, 활동 1년도 채 되지 않아 일제에 의해 다시 검거되면서 구세단을 자진 해산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되게 된다. 

 

1919년

1919년 3.1 운동이 촉발되면서 부산에 있으면서 상황을 모르던 최천택은 과거 같이 활동하던 구세단 동지들을 통해서 알아낸 정보를 통해 아우내장터에서 열린 독립운동을 지방에도 알리기 위해 경상도 전역에 3.1운동 상황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부산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선동을 시도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인해 결행되지는 못한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

최천택은 동기생 박재혁과 함께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흩어져 생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이전 구세단처럼 조직을 창설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다녔었는데, 당시 경상도 밀양 지역에서 비밀조직을 운영하고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을 만나게 되면서 더욱 음지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일제에 의해 부산지역 위험인물로 낙인찍히기까지 한다. 이후 동기생 박재혁이 상해로 건너가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면서 1920년 9월 13일, 박재혁이 의거를 하기 위해 나가사키를 통해 부산으로 들어왔을 때 같이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를 위한 작전을 같이 모의하기도 한다. 다음날인 9월 14일,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1921)와 개인면담하는 사무실에서 폭탄을 뿌리고 터뜨려 박재혁까지 부상을 입고 하시모토 슈헤이가 병원으로 옮겨진 도중 사망하게 되면서 의거에는 성공하지만 박재혁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5월 27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해버린다. 최천택은 이 의거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고문을 받고 투옥되는등 옥고를 치룬다. 풀려난 이후 최천택은 부산청년회 결성식때 부산진구락부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이전에 동지 박재혁의 의거에 영향을 받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최수봉(崔壽鳳, 1894~1921)이 밀양경찰서 폭탄의거에 실패하고(폭탄 불발) 과거 동일 이력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던 최천택이 이 사건에도 연루되어버려 체포되어 혹독하게 고문을 당한다. 

 

이후 활동

1921년 8월엔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산 안희제(安熙濟, 1885~1943)와 김철수(金喆壽, 1893~1986)등과 부산 시민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고 언론운동에도 동참하였고, 부산지역 청년들을 규합시켜 청년연맹의 안정화를 도모시켜 본격적인 활동을 꾀하고자 할 때 부산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임명되게 된다. 부산청년연맹에 소속된 이후로는 부산지역에서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데 1923년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소식을 듣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위한 발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다시 체포되었고, 1925년엔 군자금을 모금하기위한 활동을 취하다가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영향을 받고 1927년 신간회 부산지부를 결성할 때 상임 위원으로 임명되고, 1929년엔 신간회 부산지부장에 임명되게 된다. 1941년 장건상(張建相, 1882~1974)해외탈출사건과 김범보(김동리 소설가의 형)의 해인사 사건(1942년)에 연루되어 검거되고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기 전 까지 부산에서 청년, 사회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만해도 50여건이 넘을 정도로 활발하게 항일 운동을 전개한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독립된 조국을 맞이하면서 기뻐하기에도 잠시 모스크바 삼상회의(1945.12.16~12.26)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가 진행되면서 1946년엔 신탁통치 반대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지만 당시 좌익과 우익의 격렬한 충돌로 인해 최천택의 친구들도 좌우익으로 쪼개져서 대립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서 최천택은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조용히 지내게 되는데, 1948년이 되어서야 신간회를 통해 알게된 강재은(姜在殷, ?~?)과 함께 민주중보 사장에 취임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6.25전쟁으로 인해 다시 요동치게 된다. 전쟁 당시 최천택은 좌익계 인사로 분류되면서 심한 고문을 받고 사실상 집에 칩거하게 된다. 

 

사망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로 인해 당해 4월 19일 4.19혁명이 발발한 이후 60대 중반의 고령인 최천택은 노구를 이끌고 혁신동지총연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5대 국회의원 선거(1960년)에도 부산 동구 을로 출마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이듬해 5월 16일, 5.16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되면서 혁명정부에 의해 조사를 받고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겨우 풀려나지만 형무소에서 얻은 병 후유증으로 인해 1961년 11월 부산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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