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출생
1895년 5월 17일, 조선 경상도 동래군 동면 범일동리(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아버지 박희선(朴喜善, ?~1909)과 어머니 이치수(李致守, 1873~1949)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부산 출신의 의열단원인 독립운동가로서, 일찍이 학생시절부터 항일 단체를 조직하여 반일 투쟁에 적극 참여하여 학생들로 이루어진 비밀단체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자 부산공립상업학교(현재 부산 개성고등학교) 졸업 이후엔 무역쪽 일을 맡다가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게 되면서 그곳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어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박재혁에게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를 권유하게 됨에 따라 1920년 9월 14일 부산으로 들어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1921)에게 폭탄을 투척하면서 하시모토 슈헤이를 즉사시키고 박재혁은 폭발로 인해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다가 단식을 결심하고 사형 집행 이전에 옥에서 순국하게 된다.
초년 활동
부산 출신으로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시절, 남달랐던 국가관으로 일제강점기 초창기인 1910년대 초 한창 국권이 침탈당하고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 재임1910~1916)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취임하면서 조선의 역사서, 교과서 창가집등등을 모두 불태워 없애는 행동을 취하게 되면서, 박재혁은 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12년 금서로 지정되어있던 국사 교과서인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동기생이던 최천택(崔天澤, 1897~1962)과 김병태(金餠泰, 1899~1946), 박홍규(?~?)등과 함께 [동국역사]를 최천택의 집에 있는 등사기로 찍어 학교에 배포함은 물론 부산에 있던 학교에 배포하면서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버려 체포되어버린다. 이들은 일정 기간 구금 후 풀려나지만 박재혁과 최천택은 김병태, 박홍규, 오택(吳澤, 1897~1948)를 포함한 16명과 함께 비밀결사대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해 항일 투쟁을 결의 함으로서 본격적으로 투쟁을 시작함과 함께 잡지를 발간하는등 조직의 규모를 키우기위해 노력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발각되면서 체포되어버리고 이들은 조직 구세단을 자진 해산하면 풀어준다는 일제측의 제안으로 조건부 석방으로 풀려나게 된다. 1914년 졸업하기 전해에 박재혁은 최천택과 함께 다시 조직을 창설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다니는데, 당시 경상도 밀양에서 비밀조직을 운영하고 활동하고 있던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을 만나게 된다.
의열단 가입
1915년 초, 박재혁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던 것 만큼 일을 시작하지만 바로 그만두고 경상도 왜관에 있던 무역상에 취직하여 일하면서 독립투쟁을 시작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 자금은 1년 뒤인 1917년 큰 액수가 모이게 되면서 박재혁은 상해로 망명하게 되며 현지에서도 무역상으로서 일을 함과 동시에 정세를 파악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만나고 이전에 마주했던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장으로서 박재혁에게 연락을 하여 의열단으로 입단하게끔 회유하였고 1920년 8월 박재혁은 의열단에 정식 가입하게 된다.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와 순국
박재혁은 의열단에 가입한 후 약산 김원봉의 권유로 이전 의열단이 경상도 진영에서 의열단이 밀반입해온 무기들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부산경찰서 경찰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이 연행되어 많은 이들이 고문으로 고통받고 사망자가 나오는등 울분이 터지는 사건을 겪기도 하였고, 일본 본토와 제일 가까운 항구도시였던것 만큼 수탈을 일삼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1921)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 만큼 경찰서장을 암살하고 부산경찰서를 터뜨리라는 지시를 받게 되며 박재혁은 이 의거를 수락하여 1개월에 가까운 준비과정을 거쳐 1920년 9월 13일 김원봉으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건네받고 고서 상인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간신히 부산으로 입항하게 된다. 일본 본토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입항한 박재혁은 폭탄을 책 사이에 숨겨둬 부산 본인 집에서 하루를 지내고 9월 14일 아침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고서에 관심이 많던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와의 면담을 승낙받고 만나게 된다. 박재혁은 서장실에서 서로 마주보면서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숨겨둔 폭탄을 뿌리며 의열단원이라고 주장하고 폭탄을 터뜨려 둘 모두 중상을 입고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는 병원에 옮겨졌으나 사망하고 박재혁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21년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중상을 입은 채 수감되어 스스로 자결을 결심하고 단식을 진행해 사형 집행 전인 1921년 5월 27일 대구형무소에서 아사로 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