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군주(1707~현재), 고위귀족/하노버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앨버트 공

Mintaka5 2025. 7. 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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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 앨버트 공(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1819~1861)

  전임 부군(왕비) 당시 재직 부군(왕비) 후임 부군(왕비)
직위 영국 왕비 영국 여왕 부군 영국 왕비
출신
가문
마이닝겐 작센코부르타고타 글뤽스부르크
명칭 작센마이닝겐의 아델레이드
(Adelheid von Sachsen-Meiningen)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Alexandra of Denmark)
출신 작센마이닝겐 공국, 마이닝겐 작센코부르크잘펠트, 코부르크 덴마크, 코펜하겐
생몰
년도
1792.08.13 ~ 1849.12.02 1819.08.16 ~ 1861.12.14 1844.12.01 ~ 1925.11.20
배우자 영국 왕
윌리엄4세(William IV)
1765.08.21~1837.06.20
(재위1830.06.26~1837.06.20)
영국 여왕
빅토리아 여왕(Victoria)
1819.05.24~1901.01.22
(재위1837.06.20~1901.01.22)
영국 왕
에드워드7세(Edward VII)
1841.11.09~1910.05.06
(재위1901.01.22~1910.05.06)
부군
(왕비)
재위
기간
1830.06.26 ~ 1837.06.20 1840.02.10 ~ 1861.12.14 1901.01.22 ~ 1910.05.06

작센코부르크고타 앨버트 공 초상화
작센코부르타고타 앨버트 공,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19년 8월 26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코부르크(Coburg)에서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1세(Ernst I von Sachsen-Coburg-Gotha, 1784~1844, 재위1806~1844)와 어머니 루이제 폰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녀(Luise von Sachsen-Gotha-Altenburg, 1800~1831)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영국 여왕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 재위1837~1901)의 배우자로 영국 여왕 부군으로 알려져있는 인물이다. 가부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 대한 선의와 박애를 표현하는 인물로서 상당한 인기를 받은 앨버트 공은 사회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들에 대한 동정과 관심을 보이면서 특히 불우한 사람들에 관심을 많이 가져 돕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자유주의적 성향과 개혁적인 성향으로 인해 기술 발전과 순수과학,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등에 상당한 공을 기울였고 노예제 폐지까지 찬성하고 폐지 운동을 지지하는등의 행보로 많은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지만 1861년 12월 14일, 42세의 나이로 급사해버린다.    

 

초년

1819년 8월 16일에 태어나고 한달만인 9월에 루터교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성장하지만 부모의 별거와 이혼등으로 혼란스러웠는데, 5살이던 1824년에 어머니 루이제가 궁에서 추방당하면서 사실상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 앨버트의 바로 위 형인 에른스트(미래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2세, Ernst II von Sachsen-Coburg und Gotha, 1818~1893)와 서로 의지하면서 보내고 이후 본 대학교(Bonn University)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게 되고 삼촌이자 벨기에 왕인 레오폴드1세(Leopold I, 1790~1865, 재위1831~1865)의 궁정에 머무른다. 

 

빅토리아 여왕 

1836년, 삼촌 레오폴드1세가 영국 왕위 상속녀인 빅토리아와 조카의 만남을 주선한다. 빅토리아 공주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1786~1861)은 레오폴드1세와 남매지간이였는데 이를 통해 두 남녀는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고, 1837년 6월 20일, 영국 왕이자 빅토리아 공주의 숙부인 윌리엄4세(William IV, 1765~1837, 재위1830~1837)가 사망하면서 빅토리아 공주가 영국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두 남녀는 아직 약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1839년 10월 앨버트는 영국으로 와서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고 10월 15일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 공에게 청혼함으로서 1840년 2월 10일 영국 세인트제임스 궁전에서 결혼하게 된다. 앨버트는 결혼 직전 영국 의회법에 따라 영국으로 귀화하고 결혼 직후 여왕의 남편(부군)으로서 '왕자' 작위를 받는다. 앨버트의 집안 배경이 영국보다 훨씬 작았고 앨버트의 가족중에 카톨릭 신자들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의회 내에서도 앨버트의 연금 축소, 귀족으로 선임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는데 앨버트는 왕실과 아내인 여왕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다는 뜻에 의해 모든 작위받기를 거부하고 조용히 지낸다.   

 


여왕 부군으로서의 앨버트

I. 총격미수사건

1840년 6월, 앨버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임신과 더불어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에드워드 옥스퍼드(Edward Oxford, 1822~1900)라는 정신이상자의 총격을 받지만 앨버트의 용기와 침착한 대처로 두명 모두 무사하다는 것과 더불어 앨버트의 용기가 언론을 통해 칭찬을 받으면서 점점 영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된다. 이후로도 1882년까지 7차례에 달하는 총격사건을 받는 영국 왕가의 첫 총격사건은 앨버트의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II. 1840년대

1847년 앨버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현대분야에 더해 전통 분야의 포괄적 과목 확대와 조합을 함으로서 교육을 개혁하여 학문의 조화성을 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1848년 2월, 이웃 국가인 프랑스에서 루이 필리프1세(Louis Philippe I, 1773~1850, 재위1830~1848)가 퇴위하게 되는 2월 혁명이 발발하고 이 혁명의 영향이 전 유럽으로 확산됨에 따라 경제적인 문제까지 야기되게 된다. 영국에서도 이 혁명의 여파가 벌어지지만 크게 확산되지는 않고 소규모 시위로 그치면서 금방 안정화를 찾게된다.   

 

III. 만국 박람회

1851년 영국 런던에서 만국 산업 제품 대박람회(The 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ystry of all nations, 1851.05.01~1851.10.11)가 개최된다. 세계 최초의 박람회로서 전세계 각국의 물건들이 전시되었고 영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마음껏 뽐내게 된다. 앨버트는 1843년부터 이 만국 박람회 총괄 회장을 맡으면서 상당한 홍보와 운영을 모두 직접 관리, 운영하면서 성공적으로 박람회를 마치게 된다. 1843년 박람회 개최 반대를 표명한 인물들로부터 싸우고 모든 이들이 박람회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반대를 외치고 있을때 앨버트는 묵묵하게 박람회를 진행시켜 영국의 제조업을 전세계 제품과 함께 두면서 응용하여 새 제품을 발생했을 시 거둬지는 막대한 이익을 생각하고 묵묵하게 이끈다. 그렇게 1851년 5월 1일 앨버트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수정궁(The Crystal Palace)에서 아내이자 여왕인 빅토리아가 박람회 개최 연설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5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다.

 

IV. 1850년대

1854년 3월, 러시아 제국과 영국간에 크림 전쟁(The crimean war, 1853~1856)이 발발하게 된다. 앨버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작전과 계획을 고민하게 되는데, 방어전이라는 작전을 세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1세(1796~1855, 재위1825~1855)의 생각을 이용해 1년간의긴  세바스토폴 포위전(1854.10~1855.09)을 펼치지만, 장기전이 되는 행태에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었고 어쨌든간에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했던 틈에 1855년 9월 러시아 군이 세바스토폴을 버리고 퇴각함으로서 1856년 러시아 제국측에서 협상을 요청하면서 안그래도 빨리 전쟁을 마무리짓고 싶었던 영국군과 연합군은 1856년 3월 프랑스 파리(Paris)에서 조약을 체결하면서 마무리시킨다. 전쟁이후 앨버트는 많은 공립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1859년 영국 과학진흥협회 회장으로 추대되면서도 영국의 교육, 과학 개혁을 함께 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교육과 아내에도 헌신을 다했다. 

 

사망

그러나 1859년 여름, 앨버트는 복통이 심해지면서 자리에 눕게 된다. 많은 의료진들이 앨버트를 진료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건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앨버트는 왕실 업무를 멈추지 않고 공식 업무를 계속 도맡으면서 1861년 6월 5일까지 공식 업무를 계속 지속한다. 그해 12월 초, 주치의를 통해 장티푸스 감염 진단을 받고 병세가 더욱 중해지다가 12월 14일 윈저 성에서 여왕과 가족들이 보는앞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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