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3세(Friedrich III, 1415~1493, 로마왕재위1440~1493, 신성로마재위1452~1493)
| 전임 황제 | 당시 재직 황제 | 후임 황제 | |
| 직위 | 룩셈부르크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보헤미아,헝가리,로마왕, 신성로마황제 | 오스트리아 대공, 로마왕, 신성로마황제 | 부르고뉴 섭정, 오스트리아 대공, 로마왕, 신성로마황제 |
| 가문(왕조) | 룩셈부르크 | 합스부르크 | |
| 명칭 | 지기스문트 Sigismund |
프리드리히3세 Friedrich III |
막시밀리안1세 Maximilian I |
| 출신 | 신성로마제국, 뉘른베르크 | 신성로마제국, 인스브루크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비너노이슈타트 |
| 생몰년도 | 1368.02.14 ~ 1437.12.09 | 1415.09.21 ~ 1493.08.19 | 1459.03.22 ~ 1519.01.12 |
| 재위 | 룩셈부르크 공작, 보헤미아 왕 1419.08.16 ~ 1437.12.09 |
오스트리아 대공 1457.11.23 ~ 1493.08.19 |
부르고뉴 섭정 1482.03.27 ~ 1494.09.09 1506.09.25 ~ 1507.03.18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378.11.29 ~ 1397.04.03 1411.01.18 ~ 1415.04.30 |
로마왕 1440.02.02 ~ 1486.02.16 |
오스트리아 대공 1493.08.19 ~ 1519.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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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왕 1387.03.31 ~ 1437.12.09 |
로마왕 1486.02.16 ~ 1519.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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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왕 1411.07.11 ~ 1437.12.09 |
신성로마황제 1452.03.19 ~ 1493.08.19 |
신성로마황제 1508.02.04 ~ 1519.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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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로마황제 1433.05.31 ~ 1437.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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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15년 9월 21일, 신성로마제국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아버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강철공 에른스트1세(Ernst I der Eiserne, 1377~1424, 재위1406~1424)와 어머니 침바르카 마조비에츠카(Cymbarka mazowiecka, 1394~1429)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신성로마황제로, 황제로서의 능력은 부족했지만 50년간의 장기 통치기간동안 상당한 운이 따라준 인물로 기회를 잘 엿보아서 영토확장을 꾀했던 군주이다. 아들 막시밀리안을 부귀공 마리와 결혼시켜 혼인을 통해 부르고뉴 공국을 취하였고 이후 1480년대 헝가리 왕 마차시1세에 의해 1485년 빈이 점령당하여 도망치기도 했지만, 1486년 아들 막시밀리안을 로마왕으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공동통치를 하게되지만 아들 막시밀리안에게 거의 대부분의 권한을 행사하게 하여 사실상 아들의 뒤에 서서 자신은 지원만 해주고 막시밀리안이 선방하자 안정을 취하게 되는 등 재위기간 전반적으로 큰 위기를 잘 피하는 운을 가진 군주로 평가받는다. 당시 나이로 상당히 장수한 78세까지 지내며 제국내의 정책도 장수하게되면서 선제후들이 먼저 사망해버리면서 나이가 들음에 따라 권위가 강화되는 상당히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형성하며 제국을 이끌어나간다.
초년과 즉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로마왕 루돌프1세(Rudolf I, 1218~1291, 재위1273~1291)의 5대손으로 1424년 아버지 강철공 에른스트가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상속받고, 1439년 로마왕이자 합스부르크의 수장이였던 사촌형 알브레히트2세(Albrecht II, 1397~1439, 오스트리아재위1404~1439, 로마왕재위1438~1439)가 사망하면서 이듬해 1440년, 신성로마제국 선제후들이 프리드리히를 로마왕으로 추대하여 선출된다. 즉위 후 사촌형 알브레히트2세의 아들이자 조카인 어린 라디슬라우스 푸스투무스()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조카가 가지고있던 오스트리아 공작, 보헤미아, 헝가리 왕좌를 차지하고자 하였는데 보헤미아와 헝가리 귀족들의 반발로 자처한 후견을 포기한다. 그러나 무능력했던 프리드리히3세는 제국과 오스트리아등에서 대립군주들이 왕위를 주장하면서 소요가 발생하게 되면서 혼란속에서 지내게 된다. 1452년 교황 니콜라오5세(Nicolaus PP. V, 1397~1455, 재위1447~1455)에 의해 황제 대관식을 받으며 신성로마황제로 공식 인정받게 된다.
헝가리 왕위 계승 전쟁
1457년 11월 23일, 조카인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1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공석이 된 왕좌를 두고 헝가리 귀족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조카가 사망한 날, 프리드리히3세는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를 물려받고 헝가리 귀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왕위 계승 후보를 직접 제안하는데, 보헤미아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Jirí z Poděbrad, 1420~1471, 재위1458~1471)를, 헝가리는 이전에 조카 라디슬라우스와 대립하여 구금되어 있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를 헝가리 왕 후보로 제안하였고 1458년 1월 20일, 마차시가 선출되어 15세의 나이로 헝가리 왕 마차시1세(Mátyás I, 1443~1490, 재위1458~1490)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 중 영향력이 가장 크던 팔라티노 백작 라슬로 가라이(László Garai, 1410~1459, 재위1447~1458)와 트란실바니아 공작 우일라키 미클로시(Újlaki Miklós, 1410~1477, 재위1471~1477)등은 마차시1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못하고 프리드리히3세에게 헝가리 왕관을 바치기 위해 직접 찾아가게 된다. 프리드리히3세는 그렇게 헝가리 귀족세력의 힘을 입고 제국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한다. 마차시1세는 프리드리히3세가 쳐들어오자 교황 비오2세(Pius PP. II, 1405~1464, 재위1458~1464)를 찾아가 제국군을 몰아낼 군대를 얻을 조건으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을 계승한 트라페준타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약조하여 군대를 지원받고 효과적으로 막은 다음 1460년 1월 14일, 교황 비오2세 앞에 3년간 십자군 원정을 지속하기로 공식 선언하고 출정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채 1461년 트라페준타 제국은 트라페준타 포위전에서 함락당하고 멸망하고 만다.
재위기간 사건
I. 오스트리아 공작 지기스문트 파문
합스부르크 가문은 1460년대 스위스일대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 공작 지기스문트 폰 외스터라이히(Sigismund von Österreich, 1427~1496, 공작재위1439~1477, 대공재위1477~1496)가 1449년 추기경 서임건 당시 추기경이던 교황 비오2세와 마찰을 일으켰던 일로 1458년 비오2세가 교황이 되고 1460년 지기스문트가 파문당한다. 공작이 파문당하자 스위스 일대 여러 도시들이 신성로마제국 도시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이탈한다. 계속된 이탈로 인해 프리드리히3세는 1461년 6월 1일, 이탈한 도시들을 제국과 오스트리아 공국 두 국가의 공동 관할 구역으로 전환시켜 우선적으로는 안정을 취하게 한다. 그러나 1467년 이후 이 지역의 패권은 옆에 인접한 국가이던 부르고뉴 공국의 새 공작이 되는 용담공 샤를(Charles Ier de Bourgogne, 1433~1477, 재위1467~1477)이 즉위하면서 크게 바뀐다.
II. 리에주 전쟁
10년정도 전인 1456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3세(Philippe III de Bourgogne 'le Bon', 1396~1467, 재위1419~1467)은 리에주 공국을 흡수하기위해 교황 갈리스토3세(Callistus PP. III, 1378~1458, 재위1455~1458)와의 우호관계를 통해 리에주 공작을 자신의 조카 루이 드 부르봉(Louis de Bourbon, 1438~1482)으로 바꾸면서 사실상 통치를 하게 됨으로서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을 리에주까지 미치게 한다. 그러나 1465년, 리에주 시장이던 Raes de Heers, 1418~1477)가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으로 인한 불만과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부르고뉴 공국과 적대국이던 프랑스의 왕 루이11세(Louis XI, 1423~1483, 재위1461~1483)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고 1465년, 루이 드 부르봉을 폐위시키면서 리에주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2차, 3차 전쟁으로 난잡해진다.
III.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
이 전쟁을 지켜보고있던 프리드리히3세는 1474년 부르고뉴 공작의 스위스 남부지역 획득을 완강히 반대하지만 이후로도 계속된 봉기로 혼란스러웠던 찰나에 확장정책을 취하던 용담공 샤를은 신성로마제국과 경계지역인 라인강 일대 라인란트(Rheinland)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이를 가문두고 볼 수 없던 프리드리히3세는 라인란트에서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Charles Ier de Bourgogne, 1433~1477, 재위1467~1477)과 맞부딫힌다. 1475년 양국은 지원을 받아 공세를 펼칠 동안, 두 국가의 힘이 빠지는 것을 본 프랑스 루이11세는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점령한다. 서로 싸우다가 오히려 루이11세에게 뒤통수를 맞은 두 국가는 그럼에도 줄곧 전투를 벌이는데 용담공 샤를이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로렌 군과 교전하던 터에 전사해버리면서 부르고뉴 공국이 혼란에 빠진다.
IV. 아들의 결혼과 부귀공 마리
용담공 샤를에게는 외동딸 마리(Marie de Bourgogne, 1457~1482, 재위1477~1482)가 있었는데, 마리는 아버지 샤를이 전사하고 부르고뉴 여공작으로 우선 즉위한다. 이와 동시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프랑스 왕 루이11세가 군대를 이끌고 부르고뉴로 쳐들어오는 것에 부르고뉴를 지키기 위해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프리드리히3세는 부르고뉴를 지켜주기 위한 조건으로 자신의 아들 막시밀리안(미래의 황제 막시밀리안1세)대공 과 마리를 결혼시키게끔 하여 부르고뉴 공국 대부분을 획득하였고 1479년 부르고뉴 여공작 부군 막시밀리안 대공이 프랑스 루이11세와 부딫힌 전투인 긴가트 전투(The battle of Guinegate, 1479.08)에서 대승을 거두며 프랑스군을 물러가게 함으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지켜낸다. 프리드리히3세는 이 이후로 혼인 동맹을 통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늘리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1482년 3월 27일, 막시밀리안 대공은 아내 부귀공 마리가 낙마사고로 사망해 버리면서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자 장남인 펠리페(미래의 펠리페1세, Felipe I, 1478~1506, 부르고뉴재위1482~1506, 카스티야재위1506)를 새 부르고뉴 공작으로 삼고 막시밀리안 대공은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된다.
V. 1480년대 신성로마제국의 혼란기
프리드리히3세는 1480년대 들어 혼란기를 맞는데, 1481년 헝가리 왕 마차시1세()가 이전의 전쟁에서 프리드리히3세와 협상한 조건인 헝가리에 마차시1세 이후 남성 후손이 없을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흡수된다는 조건하에 마차시1세를 적법 왕으로 인정해주는 것이였는데 프리드리히3세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되면서 마차시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침략하면서 순식간에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1485년엔 수도인 빈(Wien)까지 점령당하게되어버린다. 프리드리히3세는 이런 상황에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1486년 자신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대공을 로마왕으로 임명함으로서 공동 통치를 하게 되면서 사실상 자신은 일선에서 후퇴하고 아들 막시밀리안1세에게 제국의 권한을 맡긴다. 이후 4년 뒤인 1490년, 헝가리 왕 마차시1세가 사망하면서 막시밀리안1세가 다시 뺏긴 오스트리아 영토를 탈환하면서 겨우 안정을 찾게 된다.
승하
1493년 8월 19일, 프리드리히3세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7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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