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V, 1500~1558, 재위1519~1556)
전임 황제 | 당시 재직 황제 | 후임 황제 | |
직위 | 부르고뉴 섭정, 오스트리아 대공, 로마왕, 신성로마황제 | 부르고뉴 공작, 스페인 왕, 로마 왕, 신성로마황제 |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보헤미아 왕, 로마왕, 신성로마황제 |
가문(왕조) | 합스부르크 | ||
명칭 | 막시밀리안1세 Maximilien I |
카를5세* Charles V |
페르디난트1세 Ferdinand I |
출신 | 오스트리아 대공국,비너노이슈타트 | 플랑드르, 겐트 | 스페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 |
생몰년도 | 1459.03.22 ~ 1519.01.12 | 1500.02.24 ~ 1558.09.21 | 1503.03.10 ~ 1564.07.25 |
재위 | 부르고뉴 섭정 1482.03.27 ~ 1494.09.09 1506.09.25 ~ 1507.03.18 |
부르고뉴 공작 1506.09.25 |
오스트리아 대공 1521.04.28 ~ 1564.07.25 |
오스트리아 대공 1493.08.19 ~ 1519.01.12 |
스페인 왕 1516.03.14 ~ 1556.01.16 |
헝가리,보헤미아 왕 1526.12.16 ~ 1564.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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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 1486.02.16 ~ 1519.01.12 |
로마왕 1520.10.23 ~ 1530.02.24 |
로마왕 1531.01.05 ~ 1564.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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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황제 1508.02.04 ~ 1519.01.12 |
신성로마황제 1519.06.28 ~ 1556.08.27 |
신성로마황제 1556.08.27 ~ 1564.07.25 |
*카를5세의 경우 작위가 17개에 달하여 대표작위4개만 언급.
출생
1500년 2월 24일, 스페인령 플랑드르 겐트(Gent)에서 아버지 펠리페1세(Felipe I, 1478~1506, 재위1506)와 어머니 후아나1세(Juana, 1479~1555, 재위1516~1555)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신성로마황제로 16세기 초중반 유럽을 제패했던 패자로 37년간의 황제 재위기간(1519~1556)동안 수많은 전쟁과 더불어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군림하게 한 인물로 유럽뿐만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한 광활한 식민지까지 보유하였다. 특히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와 라이벌 관계로서 재위기간 내내 대립하였고 프랑수아1세의 아들 앙리2세와도 대립한다. 루터파로 똘똘뭉친 슈말칼덴 동맹전쟁, 이탈리아 전쟁, 로마 약탈까지 군주뿐만아니라 교황 클레멘스7세까지 굴복시켜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1550년대에 들어 루터파 슈말칼덴 동맹이 제후와 선제후들까지 결속시켜 이후 1552년 작센의 모리츠에게 배신당하고 피신했다가 파사우 조약으로 마무리되나,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이전에 동생 페르디난트를 황제로 추대하는 것을 돌려 아들 펠리페에게 황제위를 물려주려했다가 도리어 수십년간 제후들과 신뢰를 구축한 페르디난트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1556년 자진 퇴위 이후 수도원에 칩거하다가 1558년 사망한다.
초년
어린 카를은 1506년, 아버지 펠리페1세(Felipe I, 1478~1506, 재위1506)가 28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리면서 불과 6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가지고있던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아 공작이 되었다(공식 아님). 어린 공작을 대신하여 섭정통치를 할 회의에서 카를의 할아버지인 로마왕 막시밀리안1세(Maximilian I, 1459~1519, 로마왕재위1486~1519, 신성로마재위1508~1519)가 섭정하는 것을 반대하고 막시밀리안1세의 딸이자 카를의 고모인 마르가레타 폰 외스터라이히(Margarete von Österreich, 1480~1530, 네덜란드총독1507~1530)가 섭정으로 임명되게 된다. 섭정이자 카를의 고모인 마르가레타는 어린 카를의 교육을 위해 당시 루뱅 대학교 총장이였던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을 개인 교사로 임명하는데 이 인물은 이후 교황 하드리아노6세(Hadrianus PP. VI, 1459~1523, 재위1522~1523)가 되는 인물로 개인 지도교사를 하고난 이후에도 카를과 지속적인 교류와함께 고문으로서 중책을 맞게되는 인물이다. 카를은 이후 1515년 1월 5일, 플랑드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공식적으로 부르고뉴 공작으로 인정받게 되며, 공적으로 완전한 공작이 된 카를은 각 도시를 방문하여 민심을 다독이면서 공약을 실천하겠다고 맹새한다.
스페인 왕 즉위
1516년 1월 23일, 아라곤 왕 페르난도2세(Fernando II, 1452~1516, 재위1479~1516)가 사망하면서 카를은 아라곤의 왕으로 즉위하고 카스티야는 여왕인 어머니 후아나(Juana, 1479~1555, 카스티야재위1506~1555, 스페인재위1516~1555)가 있었지만 정신질환을 앓던 후아나는 이미 아버지 페르난도2세로부터 토르데시야스 성에 감금당하고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시아버지인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1세(Maximilian I, 1459~1519, 로마왕재위1486~1519, 신성로마재위1508~1519)와 교황 레오10세(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가 카를이 즉위하는 것을 지지하면서 아들 카를이 즉위하여 1516년 3월 14일, 공동통치자가 되지만 사실상 실권은 카를이 모두 다 잡고 있던 실정이였다. 1517년,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한 카를은 토르데시야스 성에 구금되어있던 어머니 후아나를 만나서 카스티야, 아라곤 두 국가의 통치권을 승인받고 의회의 승인을 받고 의회로부터 충성맹세를 받은 다음 두 국가에 대한 공동통치자로 인정받게 된다.
신성로마황제 즉위
I. 대관식
1519년 1월 12일, 할아버지인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1세가 승하한다. 카를은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자로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영지를 물려받게 되고 할아버지를 이어 황제 후보로 오르게 된다. 당시 신성로마황제 후보로는 카를 이외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가 있었는데 카를이 선제후들과 유력가문에 거액의 돈을 프랑수아1세보다 더 많이 뿌린 덕분에 카를이 황제로 선출된다. 그렇게 1520년 10월 23일 신성로마제국 아헨(Aachen)에서 치뤄질 로마왕 대관식을 위해 스페인을 떠나야하는 상황에서 어린시절부터 스승이였던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을 스페인 총독에 임명하고 위임통치를 맡긴 다음 자신은 대관식을 위해 아헨으로 향하고 1520년 10월 23일 대관식을 치르면서 공식적으로 로마왕에 즉위하게 된다. 이제 남은 일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황제 대관식을 받는 일이였다.
II. 이탈리아 전쟁과 프랑수아1세
코냑동맹이 체결되기 5년 전, 1521년 5월 20일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와 나바라 왕국이 카를5세가 선출된 것에 대한 반감과 종교가 얽힌 문제등으로 전쟁이 벌어진다. 프랑스는 나바라와 베네치아 공화국등이 연합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은 스페인, 잉글랜드, 교황령, 밀라노, 만토바등과 연합하여 맞선다. 1522년 4월 27일 비코크 전투(The battle of Bicocca, 1522.04.27)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전선이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롬바르디아로 밀려나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단독으로 평화협상을 하게되면서 연합이 깨지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프랑스는 북부 칼레를 침공한 잉글랜드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를 막기도 벅찼는데, 부르봉 공작 샤를3세(Charles III de Bourbon, 1490~1527)의 재산마저 프랑스 왕실로 빼앗으려는 것에 분노한 샤를3세는 카를5세 제국군쪽에 붙게된다. 1525년 프랑수아1세는 다시 공세를 펼쳐 제국군을 밀어붙이는 것 같아 보였으나, 당해 월 파비아(Pavia)에서 프랑스 연합군이 참패해버리고 프랑수아1세가 제국군에 포로로 잡혀버리면서 전쟁이 순식간에 종료되어버린다. 포로로 붙잡혔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는 스페인에 감금되어있던 때에 마드리드 조약(The treaty of Madrid, 1526)에 직접 서명함으로서 프랑스가 영토로 가지고 있던 플랑드르, 부르고뉴,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영토주장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석방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프랑수아1세는 마드리드 조약에 명시된 조건을 모두 거부하고 새로운 전쟁준비를 하게 된다.
III. 코냑 동맹 전쟁과 로마 약탈
프랑수아1세는 마드리드 조약을 거부하고 반 황제파였던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와 동맹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등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국가들과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코냑 동맹이다. 체결된 동맹은 1526년 프랑수아1세는 이전에 포로로 잡혔던 분노로 롬바르디아 지역을 침공하고 점령하지만 제국군이 즉시 출병하여 대치하는 상황이되고 교황령 로마에서는 콜론나 가문이 교황군을 격파하고 로마를 점령함으로서 전선이 앞뒤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카를5세는 3만 5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1527년 로마로 진격하는데, 그러나 3만 5천의 병력중 30%에 해당하는 1만이 넘는 병력이 용병들이였는데 이들은 보수를 제때 지급받지 못해 불만이 가득 찬 상태였는데, 또 제국군중 대다수는 루터파 교도들로서 교황령을 깨부수겠다는 의지가 충만했기에 이들은 파죽지세로 로마로 진군하여 1527년 5월 5일, 로마 성벽에 이르른다. 교황군은 다 합쳐서 5천여명 정도였는데 포까지 가져온 제국군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고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전투 중에 제국군 지휘관인 부르봉 공작 샤를3세가 전사해버리면서 봉급문제로 분노하던 용병과 제국군이 분노하며 지휘관이 사라지면서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무분별로 성벽사이로 침투하여 로마를 약탈, 방화, 강간, 살육등을 자행하여 로마를 무법지대로 만들어버린다.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 클레멘스7세의 해산명령에도 충성서약을 깨지 않고 지키다가 모두 전사해버린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근위대는 스위스인으로 뽑고 매년 5월 6일마다 스위스 용병들이 충성서약을 한다. 스페인에 머물고 있던 카를5세는 로마 약탈 소식에 매우 당황하여 당장 약탈을 중단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1529년 교황 클레멘스7세는 카를5세와 평화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1529년 8월 코냑 동맹은 캉브레 조약(The treaty of Cambrai, 1529.08)체결로 전쟁이 끝나게 된다. 클레멘스7세는 조약체결 이후 전쟁배상금을 지불함과 동시에 1530년 2월, 카를5세를 신성로마황제로 인정하는 대관식을 치르게 하고 이후로도 1534년 선종할 때 까지 카를5세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약탈과 황제권에 짓밟힌 교황이라는 오명과 함께 트라우마를 가진 클레멘스7세는 시스티나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 1536-1541)을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에게 의뢰하게 된다.
IV. 이탈리아 전쟁
IV-1. 1536년부터 1538년까지
1536년, 카를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이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2세 스포르차(Francesco II Sforza, 1495~1535, 재위1521~1535)가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없었기에 프란체스코2세의 아내가 카를5세의 조카였기에 사실상 카를5세의 속령이 되어버린다. 이에 분노한 프랑수아1세는 다시 군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미 유럽의 패자가 되어있던 카를5세의 제국군을 홀로 상대하기엔 어려움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게되는데 무역물품과 함께 사절을 보낸 프랑수아1세는 사절단이 오스만 제국 술탄 슐레이만1세(Suleiman I the Magnificent, 1494~1566, 재위1520~1566)를 만나 동맹을 체결하고 공격준비를 마친다. 카를5세는 차지한 밀라노 공국을 장남 펠리페(미래의 스페인 왕 펠리페2세)에게 상속하게 되면서 프랑수아1세가 다시 이탈리아로 군대를 끌고 온다. 프랑스군과 제국군은 서로의 영토를 침공하기를 반복하고 위협을 가하는데, 2년간에 걸쳐 군대 소모만 계속 되고 두 군대 모두 괄목할만한 점령지 없이 전선에서 대치만오래한 결과 내적으로 압박을 받던 두 군주는 교황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의 중재로 1538년 6월 18일, 니스 화약으로 강화를 맺고 전쟁을 종결시킨다.
IV-2. 1542년부터 1546년까지
1538년 6월 18일 니스 화약으로 종결된 두 군주사이의 전쟁은 1542년 이전처럼 다시 재개되었는데 프랑수아1세는 1536년 전쟁처럼 오스만 제국 술탄 슐레이만1세와 동맹을, 카를5세는 이모부인 잉글랜드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 헨리8세의 첫째부인 캐서린 다라곤이 카를5세의 작은이모)와 동맹을 맺게 된다. 그러나 두 동맹군은 서로의 목표지점에 진격하지도 못하고 점령하지도 못하면서 대치를 번복하다가 1544년 평화조약인 크레피 조약(The treaty of Crépy, 1544)을 통해 전투가 중지되지만, 조약의 내용 중 프랑수아1세의 3남 샤를 드 프랑스(Charles de France, 1522~1545)를 황제 카를5세의 친척과 결혼을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1545년 샤를 드 프랑스가 23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크레피 조약이 무산되어버린다. 프랑수아1세의 아들 중 유일하게 장성한 앙리(미래의 앙리2세)는 아버지를 대신해 1546년 종전까지 계속 제국군과 싸운다. 이듬해인 1547년 1월 28일엔 제국군 측인 잉글랜드 왕 헨리8세가, 3월 31일엔 앙리의 아버지 프랑수아1세가 승하하면서 이후의 전쟁(1551~1559)은 앙리가 앙리2세로 즉위하면서 맡겨진다.
IV-3. 1551년부터 1559년까지
1551년, 새 프랑스 왕이 된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는 북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카를5세에게 선전포고 후 침공한다. 카를5세의 제국군은 교황 율리오3세(Iulius PP. III, 1487~1555, 재위1550~1555), 잉글랜드 여왕 메리1세(Mary I, 1516~1558, 재위1553~1558)와 동맹을 맺고, 앙리2세는 1552년 슈말칼덴 동맹(The Schmalkaldic league)으로 신성로마제국 개신교 제후들과 합세하여 타격을 입히고 포위전, 공성전등을 통해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다가 1555년 10월, 평화 협상이 벌어짐에 따라 1556년 2월 카를5세와 앙리2세간 보셀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V. 슈말칼덴 전쟁
카를5세는 열렬한 카톨릭 신봉 군주였는데,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울부짖은 종교 개혁에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 루터를 소환해 견해를 심의하게끔 하는데, 계속해서 종교 개혁을 하겠다는 루터의 의지를 꺾진 못했고,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서'를 통해 루터를 단죄하고 루터로부터 만들어진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도록 명한다. 그렇게 탄압아닌 탄압을 받던 루터와 루터파 제후들은 1531년 황제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슈말칼덴에서 동맹을 체결한다. 헤센 공작 필리프1세(Philipp I von Hessen, 1504~1567, 헤센재위1509~1567)와 작센의 요한 프리드리히1세(Johann Friedrich I, 1503~1554, 선제후재위1532~1547, 작센재위1547~1554)가 주축이 되어 황제 카를5세에 대항하게 되자 카를5세는 슈말칼덴 동맹 토벌을 지시하였는데 슈말칼덴 동맹은 내부 의견 불일치와 배신(요한 프리드리히1세의 사촌동생 모리츠의 배신)등으로 제국군에 무참히 깨어지며 동맹이 해체되게 된다. 해체 이후 15년가량 지난 1546년, 다시 슈말칼덴과 제국군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전투가 격렬하게 변해가는 국면에 1547년 3월 카를5세는 보헤미아 왕으로 있던 동생 페르디난트(미래의 황제 페르디난트1세)와 합세하여 4월24일 뮐베르크 전투에서 슈말칼덴군을 격퇴하고 작센의 요한 프리드리히1세를 포로로 사로잡고 사형을 선고받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 선제후 작위와 작센 공국 영토 일부를 제국으로 몰수당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는데 몰수당한 영토의 주인은 요한 프리드리히의 사촌동생이자 황제편으로 배신했던 모리츠(Moritz, 1521~1553, 작센재위1541~1547, 작센선제후1547~1553)에게 가버린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루터파로 똘똘뭉친 슈말칼덴 동맹이 한창 고전을 면치못하고 활동중이던 1546년, 마르틴 루터가 개혁의 결실을 보지 못한 채 6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불씨는 1547년 카를5세에 의해 슈말칼덴 동맹이 완전히 해체되어버리지만 장기적으로 신성로마제국 선제후와 제후들을 결속시킴으로서 끝까지 항쟁하던 제후들까지 합세시킨다. 이전 슈말칼덴 전쟁당시 작센의 요한 프리드리히1세의 사촌동생 모리츠가 황제측으로 배신했다가 1552년 다시 황제로부터 배신하여 제후들 편에 서서 제2차 슈말칼덴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 왕 앙리2세에게도 군사적 지원을 받아 황제 카를5세를 공격하게 되면서 배신당한 카를5세는 오스트리아로 겨우 피신하였다가 1552년 8월 2일 파사우 조약(The peace of Passau, 1552.08.02)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고 포로로 잡고 있던 헤센 공작 필리프1세와 요한 프리드리히1세를 석방시킨다. 카를5세는 이 때 동생 페르디난트로부터도 한차례 더 위기를 겪는데, 사실상 페르디난트는 형 카를5세를 대신해 1531년부터 제국 내 선제후와 제후들간을 조율하는 섭정을 오랫동안 맡아왔기에 더욱 중요한 인물이 되어있었는데, 카를5세가 후임 황제자리를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했다가 1550년대에 들어서 아들 펠리페에게 물려주려고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면서 페르디난트가 제후들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화의의 좌장이 되고 카를5세는 제후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카를5세는 화의의 처리권을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넘기고 페르디난트는 루터교를 인정하고 칼뱅교는 인정하지 않되, ''영주민은 영주의 종교를 따른다'' 라는 원칙이 결정되고 최종 합의되어 화의가 체결되게 된다. 카를5세는 1556년 황제위를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스페인 왕 직을 아들 펠리페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스페인에 있던 유스테 수도원(The monastery of Yuste)에 기거한다.
승하
1558년 9월 21일, 유스테 수도원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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