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우베르토 크레빌리(Uberto Crivelli)
172대 교황 우르바노3세(Urbanus PP. III, 1120~1187, 재위1185~1187)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171대 교황 | 172대 교황 | 173대 교황 |
| 출신 | 신성로마제국, 루카 | 신성로마제국, 밀라노 | 교황령, 베네벤토 |
| 명칭 | 루치오3세 Lucius PP. III |
우르바노3세 Urbanus PP. III |
그레고리오8세 Gregorius PP. VIII |
| 생몰년도 | 1100.xx.xx ~ 1185.11.25 | 1120.xx.xx ~ 1187.10.20 | 1100.xx.xx ~ 1187.12.17 |
| 교황선거기간 | 1일 (1181년 9월 1일) |
1일 (1185.11.25) |
1일 (1187.10.21) |
| 재위 | 1181.09.01 ~ 1185.11.25 | 1185.11.25 ~ 1187.10.20 | 1187.10.21 ~ 1187.12.17 |

출생
1120년, 신성로마제국 밀라노(Milano)에서 아버지 구알라 크리벨리(Guala Crivelli, ?~?)와 어머니(미상)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72대 교황이자 친교황파인 구엘프에 속한 크리벨리가문 출신 교황으로 교황 첼레스티노4세(Caelestinus PP. IV, ?~1241, 재위1241)의 외삼촌이기도 한 인물이다.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밀라노 약탈을 겪을 때 프랑스로 피난온 크리벨리가문답게 우베르토도 프랑스에서 성직활동을 거쳐 1173년에 교황 알렉산데르3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이후 교황 루치오3세가 선종하고 열린 교황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대립하는 도중 1187년 10월, 예루살렘 왕국이 이슬람 왕조인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Saladin, 1137~1193, 재위1174~1193)에 의해 함락당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3주일이 안된시간이 지나 선종한다.
성직
자신의 가문인 크레빌리가문은 오랫동안 교황파인 구엘프(Guelfi)에 속해있었던 것 만큼 호엔슈타우펜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 재위1155~1190)에 맞섰는데, 특히 1162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가 밀라노(Milano)를 약탈하였을 때 크레빌리가문 전체가 프랑스 왕국 루이7세(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에게 망명해서 우베르토는 프랑스에 정착해서 부르주(Bourges)대성당 부주교를 지내다가, 이후 밀라노 약탈이 잠잠해지고 안정되면서 다시 돌아와 밀라노 대성당 참사회원(Residentiary canons, 대성당 간부)이 되어 도시 창건과 함께 수도원을 설립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173년 9월, 교황 알렉산데르3세(Alexander PP. III, 1105~1181, 재위1159~1181)로부터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며 교황 알렉산데르3세와 더불어 후임 교황이 되는 루치오3세의 치세(1181~1185)까지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친다.
1185년 교황 선거
1185년 11월 25일, 교황 루치오3세(Lucius PP. III, 1100~1185, 재위1181~1185)가 선종하면서 교황 선거가 소집된다. 교황 선거는 베로나(Verona)에서 실시되는데, 이는 전임 교황 루치오3세가 1182년 로마 내 반 교황세력의 활동으로 인해 강제로 로마에서 안코나, 리미니, 파엔차, 모데나, 베로나를 전전하며 피신하면서 보내게 되는데 특히 호엔슈타우펜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 재위1155~1190)와 북부 이탈리아 영지 소유권을 두고 대립하는데 협상도 소득없이 끝나고 교황과 황제와의 대립으로 인해 이단들까지 활동을 활발하게 해버리면서 교황의 권위가 떨어져버린다. 사실상 황제 프리드리히1세의 권위와 위협으로 인해 교황을 베로나에서 나오지 못하게 봉쇄해버리고 외부에서도 교황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교황 루치오3세는 불안에 떨다가 베로나 교황궁에서 선종해버린 것이였다. 아무튼 교황 선거는 총 26명의 추기경중 8명이 불참한 18명이 참석하여 당시 교황령이 황제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에서 추기경들은 신속하게 교황을 선출하여 지휘해줄 것을 촉구하여 우베르토 크리벨리 추기경을 하루만에 교황으로 선출시킨다. 선거가 시작한지 반나절도 채 되지않은 기간동안 만장일치로 선출시킨 것으로 우베르토 추기경은 교황명을 '우르바노(Urbanus)'로 짓고 베로나 산 피에트로 인 몬테(S. Pietro in monte)에서 우르바노3세로 즉위한다.
교황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우르바노3세는, 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로마로 가는길이 막히면서 로마에 가지 못하고 베로나를 중심으로 활동하여 베네치아등에서 통치를 하게 된다. 선출 후 카노사의 마틸다 백작부인 소유 영토로 인한 분쟁으로 다시재대립하는데, 황제 프리드리히1세가 사제임명권을 스스로 가져 권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대립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만큼은 호엔슈타우펜가문에 내주기 싫었는지, 프리드리히1세의 아들 하인리히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거부하고 임명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호엔슈타우펜가 프리드리히1세와 하인리히 부자는 전임 교황 루치오3세때처럼 교황령을 위아래로 봉쇄시켜서 모든 연락수단망을 차단시켜버리고 압박하는 작전을 다시 펼치게 된다. 그렇게 우르바노3세는 최후의 카드인 파문권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지만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베로나(Verona)시민들은 파문조치가 자신의 도시에서 이루어질시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보복이 두려워 교황에게 베로나바깥에서 파문권을 사용하라고 강요하면서 사실상 베로나를 떠나라고 하면서 내부 공격을 받게되어 우르바노3세는 에스테 가문이 지배하고 있던 페라라(Ferrara)로 피신하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이슬람 국가인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Saladin, 1137~1193, 재위1174~1193)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선종
우르바노3세는 예루살렘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들은지 20일가까이 지난 1187년 10월 20일, 67세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