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필리프6세

Mintaka5 2025. 6. 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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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 왕조 초대 군주 필리프6세(Philippe VI, 1293~1350, 재위1328~1350)

  전임 군주 당시 재직 군주 후임 군주
직위 나바라, 프랑스 왕 나바라, 프랑스 왕 나바라, 프랑스 왕
가문 카페 발루아 발루아
명칭 샤를4세 미남왕
Charles IV le Bel
필리프6세 행운왕 
Philippe VI le Fortuné
장2세 선량왕
Jean II le Bon
출신 프랑스, 클레르몽 프랑스, 퐁텐블로 프랑스, 르 맹
생몰년도 1294.06.18 ~ 1328.02.01 1293.xx.xx ~ 1350.08.22 1319.04.26 ~ 1364.04.08
재위 프랑스, 나바라 왕
1322.01.03 ~ 1328.02.01
프랑스 섭정
1328.02.08 ~ 1328.04.01
노르망디 공작
1332.02.17 ~ 1350.08.22
프랑스 왕
1328.04.01 ~ 1350.08.22
프랑스 왕
1350.08.22 ~ 1364.04.08

프랑스 발루아 왕조 초대 군주 필리프6세 초상화
필리프6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93년,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Fontainebleau)에서 아버지 샤를 드 발루아(Charles de Valois, 1270~1325, 발루아재위1285~1325, 아라곤섭정1284~1295)와 어머니 마르그리트 당주(Marguerite d'Anjou, 1273~1299)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프랑스 발루아 왕조 초대 군주로, 아버지는 프랑스 왕 필리프3세(Philippe III, 1245~1285, 재위1270~1285)의 4남인 발루아 백작 샤를 드 발루아(Charles de Valois)이다. 전임 군주 샤를4세(Charles IV, 1294~1328, 재위1322~1328)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카페왕조(987~1328) 혈통이 끊기고 카페왕조 방계가문이였던 발루아 가문 백작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인 필리프가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으며 필리프6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필리프6세가 즉위하게 된 이후 필리프6세의 친척이였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점차 대립이 격렬해지다가 1337년 최후통첩을 날린 후에도 반응이 없자 필리프6세가 아키텐을 선공하면서 백년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러나 슬로이스 해전 대패, 크레시 전투 대패와 함께 대항구인 칼레항마저 잉글랜드에 점령당하고 국내 경제위기까지 겪게 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흑사병까지 창궐하면서 그야말로 상황은 최악이 되어버린다. 

 

초년

1293년 퐁텐블로에서 태어나 발루아 백작 영지에서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는데, 사촌 동생인 샤를4세가 1328년 2월 1일,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350년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프랑스 카페 왕조는 혈통이 끊기게 되고, 방계 혈통인 발루아 가문 필리프에게 넘어가게 된다. 프랑스는 특히 프랑크인들로부터 이어져오던 법인 '살리카 법'을 적용하는 국가였고 살리카 법에 의하면 여성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리프의 프랑스 왕 즉위는 별 탈없이 합의되었고, 필리프는 필리프6세로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게 되며 발루아 왕조 초대 군주가 된다. 나바라 왕까지 겸임하던 전임 군주 샤를4세 사망 후 나바라 왕국의 왕위는 필리프의 사촌형 루이10세(Louis X, 1289~1316, 재위1314~1316)의 딸인 잔 드 나바라(Jeanne de Navarre)가 여왕 호아나2세(Joana II, 1312~1349, 재위1328~1349)로 즉위하게 된다. 

 

원인의 발단

특히 필리프6세의 할아버지 필리프4세(Philippe IV, 1268~1314, 재위1285~1314)의 막내딸인 이사벨(Isabelle de France, 1295~1358)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2세(Edward II, 1284~1327, 재위1307~1327)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역시 샤를4세를 이어 왕위를 요구할 수 있던 인물이였지만 프랑스 귀족들이 필리프6세를 선택하였기에(프랑스 귀족들은 국가 정책 논리에 의거해 외국의 왕에게 왕위를 주는 것을 거부했다)필리프6세가 왕위에 오르고 한해가 지난 1329년, 에드워드3세역시 외삼촌인 필리프6세의 왕위를 인정하고 아키텐 공국의 소유권을 가진 군주로서 프랑스 왕의 신하로서의 복종을 맹세하면서 프랑스의 군주제 공석이 채워지면서 안정이되는 듯 보였다. 

 

백년전쟁 배경

그러나, 1332년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분쟁이 발발하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왕국이 1286년 알락산다르3세(Alasdair III, 1241~1286, 재위1249~1286)가 낙마 사고로 사망한 이후로 남성 후계자가 없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1세(Edward I, 1239~1307, 재위1272~1307)는 공주들을 스코틀랜드로 시집보내 사실상 잉글랜드의 속국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펴왔는데, 1328년 스코틀랜드 로버트1세(Robert I, 1274~1329, 재위1306~1329)는 이전부터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해 노샘프턴 조약(The traite of Northampton, 1328)을 통해 정식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받지만 1년뒤 1329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6살에 불과한 로버트1세의 아들 데이비드가 왕이 되었는데, 스코틀랜드 왕 존 발리올(John Balliol, 1249~1314, 재위1292~1296)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Edward Balliol, 1283~1364, 재위1332~1356)이 후계를 외치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를 찾아가 자신의 복위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에드워드3세는 프랑스 왕실의 외척으로서 동맹관계였기에 굳이 프랑스를 자극할 이유가 없어 소극적으로 임하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이 발리올을 지원해야 한다고 의견이 나오면서 1332년 발리올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얻어 스코틀랜드를 침공한다. 그렇게 발리올의 공격을 받아 데이비드2세(David II, 1324~1371, 재위1329~1371)는 프랑스로 망명와서 필리프6세의 환영을 받게 되는데, 에드워드3세는 동맹관계로서 굳이 지원할 뜻이 없었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필리프6세의 행태에 치욕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는 입장으로 바뀌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백년전쟁

I. 전쟁 발발

1334년, 에드워드 발리올이 데이비드2세의 군에 밀려 다시 에드워드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질세라 데이비드2세는 프랑스 필리프6세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점 전선이 확대되는데 점점 더 많은 군사가 스코틀랜드에 파견되면서 양국간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는데, 교황 베네딕토12세(Benedictus PP. XII, 1280~1342, 재위1334~1342)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더욱 대립이 극대화되면서 필리프6세가 잉글랜드 에드워드3세에게 침공하여 스코틀랜드를 해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에드워드3세는 이러한 프랑스의 위협에 맞서 항전할 것을 의회와 국민들에 호소하여 군대를 조직하게 되고, 프랑스 역시 1337년 4월 동원령이 내려지게 되면서 1337년 7월, 프랑스군이 아키텐을 공격하면서 116년간의 긴 백년전쟁이 시작되기에 이른다.  

 

II. 슬로이스 해전

1337년 여름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은 초반부터 잉글랜드의 공세에 밀려 프랑스 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태였는데, 필리프6세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보헤미아, 푸아 백국, 사보이등에서 지원받아 가스코뉴 지역의 요새들을 점령하고 1339년 아키텐의 주도였던 보르도를 포위하여 승기를 점치지만 격렬한 보르도의 저항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아키텐이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된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는 이대로 가다간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사실에 프랑스와 인접한 프랑스 동맹국 플랑드르와 동맹을 맺고 신성로마제국 제후들과 황제 루트비히4세(Ludwig IV, 1282~1347, 로마왕재위1313~1347, 신성로마재위1328~1347)에게까지 손길을 뻗쳐 지원을 받게 된다. 그렇게 첫 대전투는 바다에서 벌어지는데, 1340년 6월, 잉글랜드-플랑드르 연합함대와 필리프6세의 함대가 브뤼주(현 벨기에 브뤼허)에서 맞부딫히는데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거의 파괴또는 나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를 슬로이스 해전이라 하는데, 이 전투 이후 잉글랜드는 바다에 대한 제해권을 장악하여 물자수송에 지장이 없어지면서 프랑스 본토 공격이 수월해지게 된다. 

 

III. 크레시 전투

슬로이스 해전 이후 잉글랜드 에드워드3세는 바다를 통한 물자수송이 원활해짐에 따라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프랑스로 옮기기 시작하는데, 프랑스 초입 항구도시인 칼레(Calais)를 상륙지점으로 삼고 점점 전선을 확대해 나가는데, 이를 두고볼 수 없던 프랑스 필리프6세는 3만명이 넘는 대병력을 칼레 남쪽 크레시앙퐁티외(Crécy-en-Ponthieu)에 보내면서 잉글랜드 군을 소탕하고자 했다. 잉글랜드의 병력은 1만 2천 가량으로 프랑스의 40%수준정도였기에 수적으로 열세라 화력에 있어서 전술적으로 프랑스군을 격파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였다. 프랑스군은 철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를 앞장세워 용맹하게 돌격하지만 8월의 혹독한 열기와 습기로 인해 진흙탕에 발이 빠져 기동성에 있어 불리한 상황에서 잉글랜드 군의 신무기인 장궁(석궁)이 철갑옷까지 뚫어버리는 화력으로 인해 무참하게 죽어나가게 되면서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과 병사들이 전사하면서 잉글랜드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면서 필리프6세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칼레항구마저 잉글랜드에게 내주게 되면서 국내 경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서 뒷수습하기 바빠진다. 

 

승하

크레시 전투까지 대패하고 난 뒤 필리프6세는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칼레항구가 점령당하고 무역에 결점이 생겨버리면서 발생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정책에 집중하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1346년부터 유럽에 처음 등장해 확산되던 흑사병으로 인해 더욱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게 되어버리면서 세금도 제대로 거둬지지 않는 실정에 1349년 하반기부터는 아들 장(미래의 장2세)이 아버지 필리프6세를 대신해 정국을 이끌게 된다. 필리프6세는 1350년 8월 22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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