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Valois, 발루아

장2세

Mintaka5 2025. 6. 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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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 왕조 2대 군주 '선량왕' 장2세(Jean II 'le Bon', 1319~1364, 재위1350~1364)

  전임 군주 당시 재직 군주 후임 군주
직위 프랑스 왕 프랑스 왕 프랑스 왕
가문 발루아 발루아 발루아
명칭 행운왕 필리프6세
Philippe VI le Fortuné
선량왕 장2세
Jean II le Bon
현명왕 샤를5세
Charles V le Sage
출신 프랑스, 퐁텐블로 프랑스, 르 맹 프랑스, 뱅센
생몰년도 1293.xx.xx ~ 1350.08.22 1319.04.26 ~ 1364.04.08 1338.01.21 ~ 1380.09.16
재위 프랑스 섭정
1328.02.08 ~ 1328.04.01
노르망디 공작
1332.02.17 ~ 1350.08.22
프랑스 섭정1기
1356.10.17 ~ 1360.10.24
프랑스 왕
1328.04.01 ~ 1350.08.22
프랑스 왕
1350.08.22 ~ 1364.04.08
프랑스 섭정2기
1364.01.03 ~ 1364.04.08
프랑스 왕
1364.04.08 ~ 1380.09.16

프랑스 발루아 왕조 2대 군주 '선량왕' 장2세 초상화
장2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19년 4월 26일, 프랑스 왕국 르 맹(le Mans) 게 드 몰니 성에서 아버지 필리프6세(Philippe VI, 1293~1350, 재위1328~1350)와 어머니 잔 드 부르고뉴(Jeanne de Bourgogne, 1293~1348)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4일이 지난 4월 30일, 생 줄리앙 대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세례명은 '장(Jean)'이다. 

 

배경

프랑스 발루아 왕조 2대 군주로서 필리프6세의 아들로 태어나 1350년 아버지 필리프6세 사후 왕으로 즉위하고 백년전쟁을 수행하면서 잉글랜드와 계속 대립하다가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잉글랜드 군에 포로로 잡혀버리는 비운의 군주다. 포로로 잡혀 잉글랜드에 억류된 이후 아들 샤를(미래의 샤를5세)이 섭정이 되어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정국을 헤쳐나가고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체결을 통해 몸값을 지불받고 포로신분에서는 해방되지만 런던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런던에서 4년간 에드워드3세의 대접을 받으면서 지내다가 1364년 런던에서 사망하고 난 뒤 시신이 프랑스로 반환되면서 돌아오게 된다.   

 

초년

태어날 당시 프랑스는 카페 왕조 출신 군주들이 통치하고 대를 이어가던 때였는데, 아버지 필리프6세는 당시 발루아 백작으로서 방계가문의 귀족으로서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카페 왕조 마지막 군주인 샤를4세(Charles IV, 1294~1328, 재위1322~1328)가 자식 없이 승하하면서 살리카법(여성 왕위 상속 금지)을 따르던 프랑스는 카페 왕조의 방계가문인 발루아의 필리프를 프랑스 왕으로 옹립시키게 됨으로서 왕이 되자 장 역시 계승자로서 왕위 계승서열 1위가 된다. 장은 어릴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신체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여 책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여 이러한 환경에 예민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한다.

 

왕위 계승자

I. 혼인동맹

아버지 필리프가 1328년 필리프6세로서 즉위한 뒤 프랑스 발루아 왕조가 열리게 됨에 따라 정통성 확립이 시급했는데, 필리프6세는 가능한한 전쟁을 피하고 혼인동맹을 통해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장과 결혼시킬 귀족 여인을 물색하는데, 신성로마제국과의 동맹을 위해 제후중 한명인 보헤미아 왕 얀 루쳄부르스키(Jan Lucemburský, 1296~1346, 재위1310~1346)의 딸 본 드 뤽상부르(Bonne de Luxembourg, 1315~1349)와 결혼시키게끔 하는 혼인동맹을 체결하게 되고 본은 결혼지참금 12만 플로린을 가지고 프랑스로 오게 된다. 그렇게 1332년 4월 26일, 아버지 필리프6세로부터 노르망디 공국과 앙주 백국, 메인 백국 영지를 하사받고 7월 28일 본 드 뤽상부르와의 결혼식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진행되게 된다. 

 

II. 중립통치

장은 노르망디 공작이 된 후 잉글랜드와 맞닿아 있던 노르망디에 친잉글랜드 파인 귀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고 전체적으로는 프랑스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노선을 잡고 중립태도를 유지하면서 노르망디를 통치한다. 거기다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취하여 스코틀랜드와도 동맹관계를 구축하는등 잉글랜드의 도발 시 스코틀랜드가 좋은 뒷배경이 될거라는 판단으로 진행한다. 

 

백년전쟁

I. 전쟁초기 프랑스 대패

1337년 5월 24일,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와 장의 아버지 프랑스 왕 필리프6세(Philippe VI, 1293~1350, 재위1328~1350)의 대립의 골이 전쟁으로 번지게 되면서 두 국가간 116년간의 긴 백년전쟁(1337~1453)이 시작된다. 아버지 필리프6세의 아키텐 공국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백년전쟁 초기, 아버지 필리프6세는 아키텐 공국 주도인 보르도(Bordeaux)를 포위하여 점령하는데까지 성공하지만, 이에 잉글랜드 본토 침략이 현실화 될 것을 두려워한 에드워드3세가 플랑드르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4세(Ludwig IV, 1282~1347, 로마왕재위1313~1347, 신성로마재위1328~1347)에게까지 군사를 지원받아 1340년 6월 프랑스-잉글랜드 양국간의 해전인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에게 대패한다. 1341년엔 장 역시 전투에 참여하는데 1341년부터 1365년까지 벌어지게 되는 브르타뉴 계승전쟁에 두 대립세력 잔 드 펜디에브르(Jeanne de Penthièvre, 1324~1384)와 샤를 드 블루아(Charles de Blois, 1319~1364, 재위1341~1364)사이에 아버지 필리프6세가 콩플랑 칙령(L'arrêt de Conflans, 1341.09.07)을 통해 샤를 드 블루아를 지지함을 선언하면서 장이 군대 지휘관을 맡아 브르타뉴에 입성하게 되는데, 이후 브르타뉴를 손쉽게 얻었고 통치를이끌게 되지만 어린 나이와 경험부족으로 인한 통치력 부족으로 인해 물러나게 된다. 이후1346년 8월 북부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 남쪽 크레시앙퐁티외에서 일어난 크레시 전투(The battle of Crécy, 1346.08.26)에서 3배의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대패하여 이후 칼레마저 잉글랜드에게 내어주면서 국내 경제위기가 오면서 이에 집중하지만 당시 유럽을 휩쓸게 되는 흑사병까지 창궐하게 되면서 전 유럽이 비상에 걸리게 된다. 

 

II. 프랑스 왕 즉위

1350년 8월 22일, 아버지 필리프6세가 승하하면서 장이 장2세(Jean II, 1319~1364, 재위1350~1364)로서 프랑스 왕으로 등극한다. 아버지 필리프6세가 죽기전 남긴 뜻인 혼인동맹으로 오베르뉴 기욤12세 데브뢰의 딸 잔()과 재혼하여 동맹을 체결하기로 하는데, 이는 1349년 9월 11일 첫째 부인 본 드 뤽상부르가 흑사병으로 사망함으로서 재혼하게 된 것이다. 즉위한 지 한해가 지난 1351년 흑사병 대유행과 이전의 대패로 인한 경제력 저하등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막기 위해 칙령을 내려 물가 상승과 임금을 동결함으로서 급한불을 끄고, 크레시전투(1346.08.29)에 대패한 이후 프랑스 군을 재편하기 위해 왕립 군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백년전쟁이 지속중이였던 만큼 귀족들의 결속이 중요함을 깨닫고 멜룬, 탕카르빌, 아르투아, 부르봉 가문과의 연대를 통해 군사, 물자 지원등을 받게 된다.  

 

III. 웨스트민스터 조약

앞서 언급되었던 브르타뉴 계승전쟁(1341~1365)이 끝나지 않고 계속 대립됨에 따라 이를 두고보지 않던 교황 인노첸시오6세(Innocentius PP. VI, 1282~1362, 재위1352~1362)의 중재를 통해 잉글랜드, 프랑스, 브르타뉴 세 국가의 평화협상이 진행되게 된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는 샤를 드 블루아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30만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하게 하고 잉글랜드와 영구 동맹을체결하는 조건을 제시하였고 샤를 드 블루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합의가 된 뒤, 영구 동맹의 조건인 혼인으로 샤를 드 블루아의 아들 장 드 몽포르()와 에드워드3세의 딸 메리()와의 혼인으로 확정시행된다. 

 

IV. 푸아티에 전투

1356년 8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1376)는 아키텐 공국에서 병력을 결집시켜 북진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방화, 약탈, 살해를 자행하면서 중북부 요충지인 투르(Tours)에까지 다다르지만 여름 집중호우로 인해 방화를 쓸 수 없게되면서 북진이 지연되게 됨에 따라 장2세가 군대를 결집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장2세는 샤르트르에서 2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결집시켜 푸아티에쪽에서 두 국가간 군대가 맞부딫히게 되는데, 당시 26세에 불과하던 흑태자 에드워드는 아버지 에드워드3세가 1346년 크레시전투에서 사용했던 전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매복군을 활용한 기습공격을 자행하여 프랑스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데, 프랑스군은 크게 동요하며 탈영하는 병사가 속출하고 공격이 통하지 않자 퇴각을 명하고 장2세 자신도 부대를 이끌고퇴각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가 매복시켜둔 기병대에 의해 포로가 되고 보르도에 억류되었다가 잉글랜드 수도 런던에 억류되게 된다.  

 

V. 삼부회와 에티엔 마르셀

프랑스 왕 장2세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 왕실은 즉시 장2세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샤를(미래의 샤를5세)을 섭정으로 선포하고 프랑스 국정을 운영하게끔 한다. 섭정 샤를은 1356년 10월, 삼부회를 소집시켜 새로운 통화 제정 조례를 발표시켜 파리 하층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폭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미 왕이 포로로 잡혀 귀족들이 신망을 잃은 상태에서 통화 제정으로 인한 혼란이 초래되면서 파리 내 상인들중 가장 부유하고 세력이 컸던 에티엔 마르셀()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더욱 국내정세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샤를은 이후로도 삼부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3계급 신분 대표로 참석한 에티엔 마르셀을 타이르고 정책문제를 다시 뒤집어서 통화 정책을 변경하는등 최대한 반란이 커지는 것을 막고자 했는데, 에티엔 마르셀은 점점 1358년부터 왕실과 귀족세력의 권한을 제한하는 제도 도입을 주장하여 점차 그 위협이 커지게 되면서 1358년 7월 31일, 왕실 친위대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VI. 브레티니 조약

잉글랜드 측에서는 장2세의 몸값으로 400만 파운드(프랑스 2년 6개월 분량의 세금과 맞먹는다)와 함께 아키텐 공국을 다시 잉글랜드에 돌려주는 조건을 제시하는데, 무리한 조건임을 알고있던 에드워드3세였던지라 자신도 내놓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이전에 샤를4세(Charles IV, 1294~1328, 재위1322~1328)사망이후 요구한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섭정 샤를과 비밀리에 칼레 항구에서 협정을 하게 된다. 기존400만 파운드의 몸값은 프랑스측의 협상으로 300만 파운드로 낮춰지게 되고 프랑스는 300만파운드에 해당하는 금을 지불한다음 우선적으로 장2세는 포로에서 풀려나게 되고 9년간 휴전(1360~1369)을 조건으로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된다. 

 

 

최후

장2세는 포로신분에서는 풀려났지만 런던에서 지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인해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는 포로에서 풀려난 장2세를 왕의 예우로 대접하여 런던에서 지내게끔 해준다. 브레티니 조약 체결이후 4년이 지난 1364년 4월 8일, 런던 호텔 드 사부아(Hotel de Savoie)에서 장2세는 45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이후 장2세의 시신은 프랑스로 반환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의 묘역인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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