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우의정 송시열

Mintaka5 2024. 12. 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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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1607~1689

 

 

출생

1607년 충청도 옥천군에서 아버지 송갑조(1574~1628)와 어머니 곽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조선 중기 성리학자. 17세기 당대의 성리학자로 칭송받으며 이름을 높였던 대가. 노론의 영수로서 조선 후기를 사실상 판가름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였는데, 긍정적인 평가도 많지만 주로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룸. 당파 대립을 격화시켰다는 것과 지나치게 성리학적인 원리를 고집해 정작 조선의 현실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고, 강직한 성격에 군주들에게도 미움을 많이받았다. 

나무가 너무 단단하면 끊어진댔던가, 1689년(숙종15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사사된다. 

 

대가의 어린시절

초명은 성뢰(성인이 주신 아들, 아버지 송갑조가 꿈속에서 공자와 제자들을 보았다하여). 여느 신동들과 비슷하게 글자를 스스로 깨우치고 암기력까지 좋았다고 한다. 친척 송이창(1561~1627)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다가 송이창의 아들 송준길(송시열의 13촌 숙부.. 1606~1672)과 같이 공부하게 되면서 친해지게 된다.  

1618년(광해군10년) 아버지 송갑조는 관직에도 있지않았는데, 인목대비(1584~1632)폐모론에 반대하여 유폐된 인목대비를 찾아가는 등 항거하다가 발각되어 금고형(관리가 되는 길을 막는)을 받고 낙향한다. 그렇게 낙향한 아버지로부터 주자학에 대한 강의를 들어오고 아버지로부터 율곡의 역설(주자는 후세의 공자, 율곡 이이는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인용으로 주자학을 평생의 학문으로 받든다.

 

갈림길

1625년(인조2년) 숙질 송준길과 함께 김장생(1548~1631)의 문하생이 되어 1631년 김장생이 사망할때까지 학문을 배우게 된다. 이 때 문하동기로 윤선거, 유계, 윤휴, 이유태등을 만나게 된다.

  본관 생몰년도 비고
윤선거 파평 1610 ~ 1669 윤증의 아버지, 서인, 병자호란 이후 멀어짐
유계 기계 1607 ~ 1664 서인
윤휴 남원 1617 ~ 1680 남인, 예송논쟁 이후 멀어짐
이유태 경주 1607 ~ 1684 서인

그렇게 송시열은 1633년(인조10년)사마시에 장원급제 해 생원이 된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게 되면서 인조가 남한산성에 막혀 농성을 할 때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였지만 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표함으로서 일단락되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소현세자(1612~1645)와 봉림대군(미래의 효종, 1619~1659, 재위1649~1659)이 청나라에 인질로 가게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임명장이 날라와도 거부하고 학문 연구에만 집중한다.  

 

북벌론

1649년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을 받아 정계에 다시 진출하게 된다. 소신이 강했던 송시열은 기축봉사(북벌의 의지를 담은 시무책)를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북벌정책을 건의하게 된다. 김자점(1588~1651)등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일러바치는 등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는 고초를 겪어 친청세력의 압력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고향에서는 역시 후학들을 양성하며 학문연구에 집중.

1657년이 되어서야 정유봉사(북벌의 선결 과제 제시안)를 올려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이듬해 정2품 이조판서의 직책을 맡게된다. 그렇게 효종과 계속해서 북벌정책에 대한 논의를 은밀히 하면서 진행하지만,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북벌론은 무효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1662년 남명마저 멸망해 버리면서 북벌의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

이후 1674년이 되어서 남인측 허적, 윤휴등이 북벌론을 계획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의견이 협치되나 했지만 남인의 영수 허목(1596~1682)이 불가하다고 강하게 주장하여 무산된다. 

 

예송논쟁

I. 기해예송(1659)

효종의 국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 1624~1688)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송시열은 남인과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이다. 허목을 대표로하는 남인들과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서인들은 각자 다른 주장을 하면서 팽팽하게 맞서는데 대립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인 - 허목 서인 - 송시열
상복착용 기간과 주장 3년(참최복)
소현세자가 이미 사망한 이후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사실상 적자로서 계승하였기에 차장자의 예에 따라야 한다.
1년(기년복)
효종이 장남이 아닌 아들(인조의 차남)이므로 복상기간을 중자의 예에 따라야 한다.
주장 허목, 윤휴 송시열, 송준길
모자간 복식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일단 신하. 아들이 되어 어떻게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송시열은 [주자가례]에 따라 기년복을 채택하지만 허목이 이에 반대상소를 올려 팽팽하게 맞선다. 그렇게 두 세력은 팽팽하게 맞서면서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뚝심의 송시열이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기년설이 채택된다. 

그러나 이에 남인측에서는 도리어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 자체를 깎아내렸다는 주장을 하게되면서 예송논쟁이 당쟁으로 격화된다. 

 

II. 갑인예송

1674년 인선왕후 장씨(효숙왕대비, 1619~1674)가 승하하면서 당시 좌의정이던 송시열과 김수항(1629~1689)은 1659년 기해예송때처럼 인선왕후는 효종이 차남이고 그의 부인이므로 대공(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남인은 효종이 장자라는 것에 효종비 인선왕후를 장자의 부인이므로 기년설을 채택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같은 서인 내에서 송시열을 제거할 계획을 짠 김우명(1619~1675)과 김석주(1634~1684)가 남인의 기년설을 찬성하는데, 

  상복입는 기간
참최 3년
재최 3년 or 기년(1년)
대공 9개월
소공 5개월
시마 3개월

현종은 체이부정(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이란 말을 선왕(효종)의 은혜를 입은자들이 할 수있는말이냐며 남인의 기년복을 찬성하게 됨으로서 서인이 정계에서 축출된다. 

 

숙종대

I. 근황

1674년 9월 현종(1641~1674, 재위1659~1674)이 승하함에 따라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이 13세로 즉위하게 된다. 송시열은 갑인예송때 실각하고 유배를 가있었는데, 숙종이 부왕 현종의능 지문을 지으라고 명하지만 모두 고사하지만 문하생이였던 이단하(1625~1689)를 추천해 이단하가 대신 지문을 쓰게 된다.  

숙종은 송시열에 기분이 상해 비망기(한번 더 걸리면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왕명 문서)를 내리게 된다. 

 

II. 경신환국(1680)

1680년(숙종6년), 허적(1610~1680)의 조부 허잠(1540~1607)에게 시호를 내려 기념하는 잔치에 기름친 천막을 보내고자 숙종이 명하지만, 이미 허적이 허락도 받지 않고 가져가버린 것에 크게 분노한 숙종이 남인 주요 인사들을 모두 삭탈관직 시켜버리고 서인이 재집권하지만, 경신환국으로 인한 남인처벌문제 논의 과정에서 서인간 분열이 일게 된다.

거기다 1681년 윤증이 스승 송시열에게 편지한통을 쓰는데, 송시열의 편협한 정치성향, 학문적 태도까지 문제삼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윤증은 편지를 보내기 전 박세채(1631~1695)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묻자, 불화를 우려한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권유함에 따라 보내지 않는데, 박세채의 사위 송순석이 장인 박세채의 집에 있던 편지의 내용을 몰래 필사해 송시열에게 갖다 바쳐버림으로서 노발대발한 송시열은 완전히 윤증과 갈라섬을 선언하면서 노론(송시열 옹호)과 소론(윤증 옹호)으로 갈라지면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회니시비이다. 

 

III. 기사환국(1689)

노론소론 분열이후 송시열은 이미 80에 가까운 고령에 사직 상소를 올리고 다시는 중앙정계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러나 1688년 희빈 장씨(1659~1701)가 숙종의 아들을 낳게 됨에 따라 1689년이 되자마자 세자로 봉하고자 하는 것에 반대를 하게되면서 숙종의 눈밖에 나게됨에따라 화가 발생한다. 

당시 유교적으로도, 왕실법도에도 후궁의 소생을 세자로 삼는 것은 말이 안되는일이긴 했는데, 숙종이 제대로 지적한 송시열을 지목하게 됨으로서 남인은 이때다싶어 송시열을 처형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후 송시열은 고령의 나이(82세)와 워낙 대가였던지라 유배형을 내려 제주도로 보내게 되지만,

숙종 스스로도 송시열에게 별다른 잘못이 없는 걸 알고있었고 혹여나 대학자로 칭송받는 송시열을 잘못 국문했다가는 민심이 동날것을 우려해 사사(사약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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