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Bourbon, 부르봉

안 도트리슈

Mintaka5 2025. 8. 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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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

  전임 부군(왕비) 당시 재직 부군(왕비) 후임 부군(왕비)
직위 프랑스와 나바라 왕비
출신
가문
메디치 합스부르크
명칭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édicis)
안 도트리슈
(Anne d'Autriche)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Marie-Thérèse d'Autriche)
출신 피렌체 공국, 피렌체 스페인, 바야돌리드(Valladolid) 스페인, 엘에스코리알(El Escorial)
생몰
년도
1575.04.26 ~ 1642.07.03 1601.09.22 ~ 1666.01.20 1638.09.10 ~ 1683.07.30
배우자 프랑스 왕
앙리4세(Henri IV)
1553.12.13~1610.05.14
(나바라1572.06.09~1610.05.14)
(프랑스1589.08.02~1610.05.14)
프랑스 왕
루이13세(Louis XIII)
1601.09.27~1643.05.14
(재위1610.05.14~1643.05.14)
프랑스 왕
루이14세(Louis XIV)
1638.09.05~1715.09.01
(재위1643.05.14~1715.09.01)
부군
(왕비)
재위
기간
1600.12.17 ~ 1610.05.14 1615.11.21 ~ 1643.05.14 1660.06.09 ~ 1683.07.30

프랑스 루이13세 왕비 안 도트리슈 초상화
안 도트리슈,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601년 9월 22일, 스페인 왕국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아버지 스페인 왕 펠리페3세(Felipe III, 1578~1621, 재위1598~1621)와 어머니 마르그레테 폰 외스터라이히(Margarete von Österreich, 1584~1611)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프랑스 왕 루이13세의 왕비이자 루이14세의 모후이다. 스페인 출신으로서 1615년 프랑스로 시집와서 오랜기간 남편 루이13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다가 1638년 루이14세가 되는 루이 디외도네를, 1640년엔 둘째 필리프(미래의 필리프 도를레앙)를 낳는등 관계가 회복되는 듯 했으나, 1643년 루이1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리면서 아들 루이14세의 섭정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1648~1653년까지 5년간의 프롱드의 난을 온전히 다 맞닥들였고 이후 결국엔 마자랭과 함께 프랑스의 안정을 찾아내며 이후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아들 루이14세의 정치적 배경을 다져주는 인물로 남게 된다. 
 

초년

스페인 왕 펠리페3세의 장녀이자 공주로 태어나 1601년 10월 7일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 데 산도발 이 로하스()로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에서 자란다. 안 도트리슈는 11살이 되던 1612년, 프랑스-스페인 혼인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프랑스 왕이던 동갑내기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에게 시집가게 된다. 이는 당시 프랑스 왕 루이13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이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 1575~1642)는 같은 카톨릭 국가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국익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안 도트리슈를 아들의 왕비로 삼게끔 하며 마리 드 메디시스의 딸이자 루이13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타 드 부르봉(Elisabeth de Bourbon, 1602~1644)을 펠리페3세의 아들이자 왕세자인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미래의 스페인 왕 펠리페4세)를 맞결혼 시키게 한다. 안 도트리슈의 아버지 펠리페3세는 프랑스로 시집갈 어린 딸에게 스페인의 이익을 잊지 말기를 당부하며 딸을 프랑스로 보내게 된다. 14세의 두 어린남녀는 1615년 11월 21일, 스페인 부르고스(Burgos)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며 동시에 엘리자베타 드 부르봉과 아스투리아스 공은 스페인 부르고스(Bourgos)에서 1615년 10월 18일에 결혼한다. 
 

프랑스 시집살이

I. 시집살이

안은 14살의 나이로 왕비에 등극하지만 섭정이자 시어머니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던 실정이였고 루이 13세는 원치 않던결혼에 결혼 후 4년이 지난 1619년까지 안과의 관계를 가지지 않게 된다. 게다가 안은 프랑스어가 서툴렀고 스페인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프랑스 왕실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II. 1617년

1617년, 남편 루이13세가 모후이자 섭정인 마리 드 메디시스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총리대신이자 마리 드 메디시스의 수족과 같던 콘치노 콘치니(Concino Concini, 1569~1617)가 암살되고 루이13세가 직접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루이13세의 측근들은 친정을 시작한 루이13세에게 왕비에 대한 무관심으로 외교적 문제와 내부적 문제까지 발생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안은 프랑스 여성처럼 옷을 입기시작하고 행동하고 프랑스어를 빠르게 익힘으로서 점차 부부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1619년에 대신들은 두 남녀에게 부부관계를 갖도록 사실상 강요하고 점차 더 개선되지만 여러차례 유산을 겪으면서 루이13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III. 혼란기

1630년대 들어도 루이13세와 안 도트리슈 간에는 자녀가 없었다. 군주로서의 루이13세는 왕위를 물려줄 계승자도 없어 불안해했는데 그 이유는 루이13세의 남동생인 가스통 도를레앙(Gaston d'Orleans, 1608~1660)이 호시탐탐 음모를 꾸며 왕위를 노리고 있던 것 때문이였다. 1624년 새로이 총리대신이 되는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 1585~1642)이 들면서 분위기가 새로이 전환되는데, 이전에 추기경은 루이13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 모자관계를 화해시킨 중재자로서 이름높았고 총리대신이 되고 마리 드 메디시스의 신하같은 행보를 보이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루이13세와 점점 뜻이 맞게 되고 신임을 얻어나가게 된다. 안 도트리슈는 프랑스로 오기 전 아버지 펠리페3세의 스페인을 잊지 말고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는 행동을 보이는데, 의심이 점점 커질 때 쯤 1635년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전쟁이 터지고 1637년 8월, 앤은 내통 의심을 받고 조사를 한 결과 모든 내용이 들통나게 되면서 안의 측근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사실상 궁에 연금된다.   
 

IV. 임신

안이 궁에 연금되고 난 직후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루이13세의 태도가 180도 바뀌게 된다. 이들의 첫째 아들인 루이 디외도네(미래의 루이14세)가 1638년 9월 5일에 태어났으니 적어도 1638년이 되기 직전쯤에 임신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들을 임신한 안을 루이13세는 그녀를 신임하게 되며 이전의 냉랭한 적개심은 온데간데 없고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된다. 첫째 루이 디외도네를 낳고 몇개월 지나지 않은 1639년 초, 안은 둘째를 임신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V. 루이13세의 사망과 프롱드의 난

1642년 12월엔 리슐리외 추기경이 선종하고 이듬해 5월엔 남편 루이13세마저 사망해버린다. 그렇게 5살에 불과한 첫째 아들 루이 디외도네가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로서 즉위하지만 어린 나이로 인해 안 도트리슈가 아들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섭정을 보좌할 대신으로서는 호시탐탐 루이13세의 왕좌를 노리던 도련님 가스통 도를레앙과 콩데 친왕 앙리2세 드 부르봉(Henri II de Bourbon-Condé, 1588~1646), 추기경 마자랭(Cardinal Mazarin, 1602~1661)등이 임명된다. 그러나 1648년, 파리 고등법원이 섭정의 칙령 등록을 거부함으로서 왕실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안은 두 아들을 데리고 마자랭과 함께 1649년 궁을 떠나서 떠돌이 생활을 한다. 이미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땐 친스페인주의를 버리고 아들의 왕국에 대한 국익만 생각했던 안 도트리슈는 떠돌이 생활을 할때 발각되었을 땐 어떠한 굴욕을 감내하고도 아들을 지키는데 집중한다. 5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프롱드의 난을 맞닥들이면서 반군과 맞서다가 이후 파리의 시민들과 부르주아 계층들이 왕실 복귀를 허락함으로서 1653년 왕실은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미 안은 1651년 아들 루이14세가 13세의 성년에 도달하자마자 섭정직을 내려놓았던 상태였다. 
 

사망

프롱드의 난 이후 안정기를 찾은 아들의 왕국에서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던 안 도트리슈는 1661년 마자랭이 선종한 이후에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은퇴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665년 갑자기 유방암 진단을 받고 1666년 1월 20일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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