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식 이름 :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Elisabeth de Bourbon, 1602~1644)
스페인 식 이름 : 이사벨 데 보르본(Isabel de Borbón, 1602~1644)
| 전임 왕비 | 당시 재직 왕비 | 후임 왕비 | |
| 직위 | 스페인 왕비 | ||
| 출신가문 | 합스부르크 | 부르봉 | 합스부르크 |
| 명칭 |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 Margarete von Österreich |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Elisabeth de Bourbon | 마리아 안나 폰 외스터라이히 Maria Anna von Österreich |
| 출신 | 신성로마제국, 그라츠 | 프랑스, 퐁텐블로 | 신성로마제국, 비너노이슈타트 |
| 생몰년도 | 1584.12.25 ~ 1611.10.03 | 1602.11.22 ~ 1644.10.06 | 1634.12.23 ~ 1696.05.16 |
| 결혼날짜 | 1599.04.18 | 1615.11.25 | 1649.10.07 |
| 부군 | 스페인 왕 펠리페3세 Felipe III (1578~1621, 재위1598~1621) | 스페인 왕 펠리페4세 Felipe IV (1605~1665, 재위1621~1665) | |
| 왕비재위 | 1599.04.18 ~ 1611.10.03 | 1621.03.31 ~ 1644.10.06 | 1649.10.07 ~ 1665.09.17 |

출생
1602년 11월 22일, 프랑스 퐁텐블로(Fontainebleau)에서 아버지 앙리4세(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와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 1575~1642)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가 있다.
배경
프랑스 공주이자 스페인 왕비가 되는 인물이다. 아버지 앙리4세가 1610년 5월 14일, 루브르 궁 앞에서 카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이약에게 암살당하고 오빠 루이13세가 즉위하지만 어린나이로 인해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원치않던 결혼을 오빠 루이13세까지 맞결혼 시키면서 스페인 왕실과 하게 된다. 1615년 11월 25일 스페인 왕세자이자 아스투리아스 공인 펠리페와 결혼하였고 이후 1621년 3월 31일 시아버지 펠리페3세가 사망함으로서 남편 아스투리아스 공이 펠리페4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엘리자베트도 스페인 왕비로 즉위하게 된다. 남편 치세 초기 올리바레스 백공의 정치행위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이후 올리바레스 백공이 실각하면서 카탈루냐 봉기를 저지하러간 남편 펠리페4세로부터 섭정에 임명되어 물자지원과 자금지원등을 뒤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통해 잘 수행한 덕분에 남편과 왕실, 스페인 국민들로부터 칭송받는다.
초년
1602년 앙리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은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의 어린시절부터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출생한 직후에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1세(Carlo Emanuele I di Savoia, 1562~1630, 재위1580~1630)와 공작부인 캐서린 미켈라(Catalina Micaela, 1567~1597)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자 사보이 공국 후계자였던 필리프 에마누엘(Philippe-Emmanuel, 1586~1605)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1605년 필리프 에마누엘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해버리면서 결혼은 없던일이 되어버린다. 엘리자베트는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생제르맹 앙레(Saint Germain-en-Laye)성에서 가정 교사의 수업을 받으며 조용히 지내는데, 8세가 되던 무렵인 1610년 5월 14일에 아버지 앙리4세가 루브르 궁전 앞에서 카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 1578~1610)으로부터 칼을 맞고 암살당하게 됨에 따라 오빠인 루이 드 프랑스가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으로 즉위하고 어린나이에 즉위한 것에 대해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맡게 된다.
원치않던 결혼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아버지 사후 오빠 루이13세의 섭정이 되면서 프랑스의 모든 실권을 사로잡게 되면서 엘리자베트는 섭정이였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없던 실정이였다. 당시 프랑스 상황으로 마리 드 메디시스는 스페인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마리 드 메디시스의 총애를 받던 최측근 대신 콘치노 콘치니(Concono Concini, 1569~1617)의 뜻에 따라 루이13세는 스페인 왕 펠리페3세(Felipe III, 1578~1621, 재위1598~1621)의 딸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와 결혼하기로 하고, 엘리자베트는 펠리페3세의 아들이자 스페인 왕위 계승자였던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미래의 펠리페4세)와 맞결혼 하게 된다. 그렇게 1615년 11월 25일, 엘리자베트는 오빠 루이13세와 함께 각자 결혼할 베필을 페전트 섬(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가로지르는 비다소아강 중간에 위치한 하중도)에서 만나게 된다. 이렇게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양국 혼인 동맹을 통해 두 국가간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결혼생활과 왕비
엘리자베트의 남편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는 엘리자베트보다 3살 연하(1605년생)이였는데, 결혼 직후엔 남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다가 1621년 3월 31일 시아버지 펠리페3세가 병으로 인해 사망해버리면서 남편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가 스페인 왕 펠리페4세(Felipe IV, 1605~1665, 재위1621~1665)로 즉위함에 따라 엘리자베트도 남편이 있던 궁으로 들어오게 되고 엘리자베트도 왕비에 등극하게 된다. 그렇게 곧 임신을 한 엘리자베트는 펠리페4세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출산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 펠리페4세는 여러 정부(애인)을 두었고 정부들 사이에서 여러 사생아를 두면서 엘리자베트의 속이 말이 아니게 된다. 엘리자베트는 왕비로서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거의 모든 시간을 문학, 시 창작, 예술활동, 연극등에 관심을 두고 몰두하면서 당시 갓 바로크 문화가 시작된 스페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후원자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정치력
엘리자베트는 1640년 6월 7일, 동부 카탈루냐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남에 따라 남편 펠리페4세가 직접 원정을 떠나야했던 상황에 원정 당시에 남편으로부터 섭정에 임명된다. 당시 엘리자베트는 이전부터 사실상 왕실 최측근으로서 정치를 전담하던 올리바레스 백공 가스파르 드 구스만(Gaspar de Guzman, count-duke of Olivares, 1587~1645)가 엘리자베트 왕비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막았기에 둘 사이가 영 좋지 않았는데, 올리바레스 백공이 카탈루냐 봉기문제, 포르투갈 혁명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에 실각하고 난뒤 펠리페4세가 단독통치를 선언함으로서 다시 재차 카탈루냐 봉기문제가 터지면서 아내를 의지하여 다시 섭정에 임명한다. 엘리자베트는 후방에서 원정나간 남편을 위해 군수물자 공급, 자금 지원등을 잘 해준 덕분에 남편 펠리페4세로부터 인정을 받고 스페인 왕궁내는 물론 스페인 국민들에게도 칭송받는다.
사망
그러나 1644년 10월 6일, 엘리자베트는 펠리페4세와 아홉번째 자녀를 출산하다가 사망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