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에우제니오3세

Mintaka5 2025. 6. 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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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베르나르도 데이 파가넬리(Bernardo dei Paganelli)

167대 교황 에우제니오3세(Eugenius PP. III, 1080~1153, 재위1145~1153)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166대 교황 167대 교황 168대 교황
출신 신성로마제국, 볼로냐 신성로마제국, 피사 교황령, 로마
명칭 루치오2세
Lucius PP. II
에우제니오3세
Eugenius PP. III
아나스타시오4세
Anastasius PP. IV
생몰년도 ? ~ 1145.02.15 1080.xx.xx ~ 1153.07.08 1073.xx.xx ~ 1154.12.03
교황선거기간 1일
(1144.03.09)
1일
(1145.02.15)
1일
(1153.07.08)
재위 1144.03.12 ~ 1145.02.15 1145.02.15 ~ 1153.07.08 1153.07.08 ~ 1154.12.03

167대 교황 에우제니오3세 초상화
에우제니오3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080년, 신성로마제국 피사(Pisa)에서 아버지(미상)와 어머니(미상)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67대 교황으로, 시토회 수도사에서 수사로서 수련생활을 거치고 교황 인노첸시오2세로부터 수도원장에 임명되며 이후 1145년 루치오2세 선종이후 열리는 교황선거에 선출되기까지 추기경에 임명되었다는 정보는 없고 수도원장으로서 교황에 선출되는 인물이다. 즉위부터 로마 원로원과 마찰이 일어나면서 흥분한 로마 시민들에 의해 로마에서 도망쳐나와 비테르보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수년간 대립을 이어오다가 1144년 12월, 에데사 백작령이 셀주크 투르쿠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에 의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고 유럽내 카톨릭 군주들에게 참여를 호소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달하기까지 각국 군사들은 셀주크 투르크 군에의해 격파당하면서 사기가 꺾인상태였고 어찌저찌 예루살렘 왕 보두앵3세(Baudouin III, 1131~1162, 재위1143~1162)이 십자군을 규합시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지만 다마스쿠스 군주의 기만술에 휘말리면서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지고 협상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고 십자군은 사실상 흐지부지된다. 교황은 이러한 소식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으나, 겨우 복귀했던 로마왕 콘라트3세에게 로마로 군대를 진군시켜 원로원을 공격해달라고 청을 넣지만 움직이지 않고, 콘라트3세 사망 이후 즉위하는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에게 기대를 걸고 군대 진군을 기다리다가 1153년 7월 8일 로마로 복귀하지 못한 채 선종한다. 

 

성직

귀족가문 파가넬리 가문 출신으로서 어린시절 시토회에 입회하여 수도사가 되어 수도생활을 거쳐 1135년 교황 인노첸시오2세(Innocentius PP. II, ?~1143, 재위1130~1143)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여러 경력을 거쳐 1140년에는 폰타네 수도원 수도원장이 되었다. 추기경 서품 시점은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고, 이후 교황으로 선출될 때 직책이 성 아나스타시오 수도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145년 교황 선거

1145년 2월 15일, 교황 루치오2세(Lucius PP. II, ?~1145, 재위1144~1145)가 즉위한지 1년만에 선종하면서 교황 선거가 소집된다. 루치오2세는 짧은 재위기간동안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경계하는 로마 원로원과 맞서면서 원로원은 대립교황 아나클레토2세의 동생인 조르다노 피에를레오니(Giordino Pierleoni)를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시키면서까지 루치오2세와 대립하는데, 이에 교황은 교황군을 이끌고 직접 원로원을 치다가 공격에서 패하고 중상을 입고 선종해버리면서 추기경들이 선거에 모이게 된 것이였다. 그렇게 선종당일인 1145년 2월 15일, 추기경들은 만장일치로 성 아나스타시오 수도원장 베르나르도 데이 파가넬리를 교황으로 선출시킨다. 그렇게 베르나르도는 에우제니오3세로 명명하고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즉위부터 혼란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새 교황 에우제니오3세에게 로마 원로원의 권위를 인정하고 권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교황은 거부하고 이에 반하는 로마 시민들중 일부가 폭동을 일으킨다. 에우제니오3세는 폭도들을 피해 로마에서 파르마(Parma)로 향해 그곳에 있는 수도원에서 머물면서 2월 18일, 교황으로서 즉위식을 거행하게 되며 혼란스러운 로마를 대신해 비테르보(Viterbo)를 주 거주지로 선택하고 머무르게 된다. 그 사이 로마는 폭도들에 의해 혼란에 빠지며 성직자들의 숙소와 수녀원, 수도원등이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약탈까지 당하면서 혼란에 빠지자 원로원 내에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교황 반대파중 한명이였던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old of Brescia, 1090~1155)가 교황으로부터 임명되는 총독제를 폐지하고 선출직으로 교체하면서 새로운 로마 총독 조르다노 피에를레오니(Giordano Pierleoni,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2세의 동생)가 뽑히게 된다. 교황은 이에 질세라 새로 선출된 총독을 파문시키고 교황령 근방 도시들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여 로마로 공격할 준비를 하게 된다. 로마 시민들은 이에 겁을 먹고 원로원 의원들도 이에 교황과 협상을 시도하여 에우제니오3세가 즉위한지 10개월이 지난 1145년 12월, 양측간 상호 합의를 통해 교황 에우제니오3세가 매년 금500리라를 로마 총독부에 납부하는 것으로 끝내지며 이러한 교황의 약속과 함께 원로원에서는 선출직으로 바꿨던 로마 총독직을 교황이 임명하는 형태로 다시 복구시킨다는 약조와 함께 크리스마스에 에우제니오3세는 로마로 잠시 와서 성탄절 미사를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약조는 교황 에우제니오3세가 협약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1146년 3월 다시 로마를 떠나 비테르보에 머물게 된다. 

 

II. 2차 십자군

1144년 12월 24일, 아직까지 비테르보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 에우제니오3세는 에데사 백작령(현 튀르키예 남부 샨르우르파)이 셀주크 투르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Ahmad Sanjar, 1086~1157, 재위1118~1157)의 투르크군에 의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소식으로 성지가 위협받게 된 상황과 함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위기로 인해 교황은 1145년 12월 1일, 칙서 'Quantum formeres'를 발표하면서 유럽 카톨릭 국가 군주들에게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면서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당시 프랑스 왕 루이7세(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와 신성로마제국 로마왕 콘라트3세(Konrad III, 1093~1152, 재위1138~1152)역시 교황 에우제니오3세가 직접 제국영토로 와서 제국내 모든 제후들 앞에서 한 연설로 감명받아 십자군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에 나선 군주들은 당장에 도우러 갔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협력을 받지도 못하고 단독으로 진군하다 셀주크 투르크 군에의해 수차례 패배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병력들이 중간에 소진이 많이되며 전투의지가 매우 낮았지만 예루살렘 왕 보두앵3세(Baudouin III, 1131~1162, 재위1143~1162)는 이들을 재규합해 다마스쿠스(Damascus)를 공격하기로 합의하고 1148년 7월, 십자군을 모아 공격을 감행하지만 다마스쿠스 군주는 우물과 샘을 메우면서 식수를 끊게해버리고 다른 이슬람 왕조들의 도움 요청을 보내 십자군에게 장기적인 위협이 되게 하고(겁을 먹게끔), 십자군 내부에 간자를 심어 이간질시키면서 내부결속이 제대로 되지 않던 십자군은 4일만에 아무런 전투없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고 사실상 십자군은 해산되어 다시 각자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교황 에우제니오3세는 이러한 어이없는 결과를 낸 십자군 원정에 실망하고 만다. 

 

III. 도움 요청

1149년 10월이 되어서야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 복귀한 로마왕 콘라트3세는 교황 에우제니오3세의 도움요청 편지를 받게 되는데, 교황이 대립하고 있던 로마로 와서 로마 원로원을 공격해달라는 메시지를 받지만 콘라트3세는 당장에는 호의를 표시하지만 결코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에 로마 원로원은 독자적인 헌법을 승인하기도 하지만, 귀족들중 교황과 가까운 이들이 로마 시민들에게 교황이 로마에 있어야 안정과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설득하면서 잠시 로마로 올 수 있게 되지만 로마 내에서 다시 분열이 일어나면서 티볼리로 가게 된다. 

 

선종

1152년 2월, 신성로마제국 로마왕 콘라트3세가 사망하고 새로이 선출되어 즉위한 로마왕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 재위1155~1190)와 1153년 3월 교황 특사와 체결한 콘스탄츠 조약(1153)을 통해 교황이 로마에서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세력을 몰아내는것에 대한 내용으로서 프리드리히1세는 이에 동의하며 교황 에우제니오3세는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가 로마로 진군하기를 기다리다가 1153년 7월 8일 로마로 돌아가지 못한 채 티볼리(Tivoli)에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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