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대 교황 멜키아데(Melchiades PP. , ?~314, 재위311~314)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31대 교황 | 32대 교황 | 33대 교황 |
| 출신 | 서로마제국, 샤르데냐 | 북아프리카 | 서로마제국 |
| 명칭 | 에우세비오 Eusebius PP. |
멜키아데 Melchiades PP. |
실베스테르1세 Silvester PP. I |
| 생몰년도 | ? ~ 309.10.21 | ? ~ 314.01.11 | ? ~ 335.12.31 |
| 교황선출 | 309.04.xx | 309/310.08.17 | 314.01.31 |
| 재위 | 309.04.18 ~ 309.10.21 | 311.07.02 ~ 314.01.11 | 314.01.31 ~ 335.12.31 |

출생
출생년도 미상이며,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이외에 정보가 없다.
배경
교황으로 즉위 이전까지 기록이 전무하며, 311년 7월에 즉위하기 이전에 두 교황 마르첼로1세와 에우세비오 교황이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에 의해 유배되고 지속적인 카톨릭 교의 탄압이 진행되고 있을 때 황제 갈레리우스에 의해 311년 세르디카 관용 칙령이 발표 되고 막센티우스 황제의 교황 선출을 윤허받으면서 멜키아데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게 된다.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1세의 카톨릭 관용 칙령을 통해 크리스트교가 공식으로 공인되는 순간을 목격한 교황이기도 하다.
성직 배경
311년 7월 2일, 교황직으로 오르기 전 까지 어떻게 수도과정을 거치고 어디에서 수도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사제와 주교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이 매우 복잡했는데, 309년엔 당시 교황 마르첼로1세(Marcellus PP. I, ?~309, 재위308~309)와 교황 에우세비오(Eusebius PP. , ?~309, 재위309)가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Maxentius, 283~312, 재위306~312)에 의해 추방당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면서 한동안 교황직이 공석이 되어버린다. 황제 막센티우스는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칙령을 내리고 북아프리카 출신인 멜키아데스를 교황으로 선출한다(교황으로 뽑힌 날짜와 즉위한 시점에 날짜 차이가 있다).
교황
I. 카톨릭 박해
당시 로마 제국은 카톨릭교를 믿는 행위를 범죄로 간주하였기에 수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추방당하고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카톨릭은 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 190/200~251, 재위249~251),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00~?, 재위253~260),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3~305, 재위284~305)등의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였고
II. 세르디카 관용칙령
311년 건강이 나빠진 말년의 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 250~311, 재위305~311)가 세르디카 관용칙령(The Edict of Toleration by Galerius, 311)을 발표하여 카톨릭 교도들에게 사면을 허락하고, 막센티우스 역시 갈레리우스의 세르디카 관용칙령을 존중하여 멜키아데 교황을 선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멜키아데는 박해기간동안 몰수당한 교회의 재산을 도시를 관할하던 총독을 통해 빼앗겼던 교회 재산을 다시 찾아오게 된다. 멜키아데 교황은 시칠리아에 묻혀있던 전임 교황 에우세비오 교황의 유해를 다시 로마로 옮겨 제 지내고, 로마 내 새로운 정계구도의 변화를 목격한다.
III.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는 312년 10월 28일, 멜키아데 교황은 당시 황제 막센티우스(Maxentius, 283~312, 재위306~312)와 콘스탄티누스1세(콘스탄티누스1세 '대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312.10.28)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꺾고 로마로 입성하는 것을 두눈으로 목격한다. 콘스탄티누스1세는 카톨릭에 호의적인 군주였는데, 313년 3월에 콘스탄티누스1세는 메디올라눔 칙령(메디올라눔은 밀라노의 옛 말이다)을 통해 로마 서방 황제 콘스탄티누스1세와 로마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 263~325, 재위308~324)가 합의하여 서명하고 6월 13일 공포함으로서 카톨릭은 탄압받다가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비호를 받는 위치로 격상하여 종교활동과 포교등을 장려하게 되며, 이전의 탄압으로 인해 몰수된 교회 재산을 모두 돌려주라고 공표함으로서 확실하게 종교활동이 보장받게되는 최초의 사건이 된다. 거기다 콘스탄티누스1세는 멜키아데 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을 카톨릭 교회에 기증해 교황의 거처로 삼으면서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사용하게끔 하였고 이 건물을 통해 현재의 라테라노 대성당이 등장하게 되었다.
IV. 도나투스 파
313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왕국에서 주교간의 대립이 발생한다. 284년에 즉위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3~305, 재위284~305)의 재위 시기는 카톨릭 박해가 극심했는데, 이 때 많은 카톨릭 교도들이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버린다. 이 때 신앙을 버린 이들을 '배교자(Traitores)'라고 하였고 313년에 콘스탄티누스1세로부터 카톨릭이 공인됨으로서 카르타고 지역 교회는 신앙을 버린 배교자들을 두고 배교자를 색출하고 처분하는 것을 두고 극단적인 분리파 도나투스 파가 나타나게 된다. 도나투스 파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배교자들을 받아들인 일반 카톨릭 전체를 타락한 교회로 규정해버리고 이에 일반 카톨릭 교회는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도나투스 파는 이에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배교자 용서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암살할 계획까지 세우는등 더욱 극단적인 행태를 보인다. 보편교회 주교 카이킬리아누스(Caecilianus)와 카세네레의 도나투스(Donato di Case Nere, 270~355)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카르타고 집정관 가이우스 아눌리누스(Gaius Anullinus, ?~?)는 황제 콘스탄티누스1세의 개입을 요청해 이 두 주교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모아 325년 5월 제1차 니케아 공의회(The first council of Nicaea, 325.05.20)에서 해결하게 한다.
선종
멜키아데 교황은 314년 1월 10일, 선종하고 성 갈리스토 지하묘지(Le Catacombe di San Callisto)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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