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피에르 로제(Pierre Roger)
198대 교황 클레멘스6세(Clemens PP. VI, 1291~1352, 재위1342~1352)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197대 교황 | 198대 교황 | 199대 교황 |
출신 | 프랑스, 사베르됭 | 프랑스, 리모주 | 프랑스, 베사크 |
명칭 | 베네딕토12세 Benedictus PP. XII |
클레멘스6세 Clemens PP. VI |
인노첸시오6세 Innocentius PP. VI |
생몰년도 | 1285.xx.xx ~ 1342.04.25 | 1291.xx.xx ~ 1352.12.06 | 1282.xx.xx ~ 1362.09.12 |
콘클라베기간 | 8일 (1334.12.13~1334.12.20) |
3일 (1342.05.05~1342.05.07) |
3일 (1352.12.16~1352.12.18) |
재위 | 1334.12.20 ~ 1342.04.25 | 1342.05.07 ~ 1352.12.06 | 1352.12.18 ~ 1362.09.12 |
출생
1291년 프랑스 사베르됭(Saverdun)에서 아버지 기욤1세 로저(Guillaume Ier Roger, 1270~1338)와 어머니 기예메트 데 메스트르(Guillemette de Mestre, 1270~1338)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98대 교황으로, 베네딕토회 출신으로 청빈한 삶을 추구하고 신학자의 면모를 보이며 그 면모를 곤고히 하지만, 1342년 교황 베네딕토12세(Benedictus PP. XII, 1285~1342, 재위1334~1342)가 선종한 이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클레멘스6세로 즉위한 이후, 전임 교황 베네딕토12세가 착실히 모아둔 재정의 지출을 크게 늘려 교황궁 증축, 건설, 예술가 후원등에 많이 써버려 후임 교황이 되는 인노첸시오6세(Innocentius PP. VI, 1282~1362, 재위1352~1362)때에는 교황청 재정에 위기가 와버리면서 긴축 상태에 돌입하지만 흑사병까지 겹쳐버리는 마당에 재정이 회복되기는 커녕 더 악화되는 시점에 이른다. 클레멘스6세는 흑사병을 하느님의 진노로 규정하고 주의하면서도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에게로 돌려 수많은 유대인 학살자들이 발생하게끔 한 장본인이다.
성직
10세가 되던 해인 1301년 라 셰즈-디외(La Chaise-Dieu)수도원에 들어가 베네딕토회 수도사가 된 후 파리에서 유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치고 1326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직 사목활동을 시작하면서 수도원장(페캉)이 된다. 1328년 교황 요한22세(Ioannes PP. XXII, 1244~1334, 재위1316~1334)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이듬해 1329년 대주교에 승품되어 프랑스 왕 필리프6세(Philippe VI, 1293~1350, 재위1328~1350)의 궁에서 교황 대사와 왕실 고문을 역임하면서 사실상 필리프6세의 최측근이 되면서 당시 왕세자였던 장(미래의 장2세)과도 친분을 맺고 가깝게 지낸다. 1338년 47세의 나이로 교황 베네딕토12세(Benedictus PP. XII, 1285~1342, 재위1334~1342)로부터 사제급 추기경 서임을 받게 된다.
1342년 콘클라베
1342년 4월 25일, 교황 베네딕토12세가 선종하고 10일 뒤인 5월 5일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6세(Philippe VI, 1293~1350, 재위1328~1350)는 아들이자 왕세자인 장(미래의 장2세)을 아비뇽 교황청으로 보내 피에르 로제 추기경 교황 후보 지원을 하게끔 시키게끔 하여 총19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2명이 불참한 17명이 투표에 참석한1342년 5월 5일부터 5월 7일까지 3일간 진행된 콘클라베는 피에르 로제 추기경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클레멘스6세로 명명한 뒤 즉위한다.
교황
I. 지출 과다
클레멘스6세는 즉위 이후 전임 교황 베네딕토12세가 착실하게 재정관리를 하여 아비뇽 교황청 내 재정이 여유로운 편이였는데, 클레멘스6세는 재위기간 동안 사치, 낭비벽이 너무 심해 교황궁에 경당을 추가로 짓고 교황궁 내 프레스코화로 도배, 축제 행사, 예술가후원등 재정을 아끼는 교황이 아니였고 지출이 심한 교황이였다. 10년의 재위기간동안 너무 많은 재정을 지출함에 따라 후임 교황 인노첸시오6세(Innocentius PP. VI, 1282~1362, 재위1352~1362)때는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지출을 줄이다 못해 어쩔 수 없이 성직매매까지 시도하게 된다.
II. 흑사병
클레멘스6세 치세 중반인 1346년 유럽에 흑사병이 처음 등장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산이 가속화되고 1348~1349년에는 전 유럽에 흑사병이 확산하게 된다. 흑사병이 나오기 전 유럽 전체의 인구는 8천만명 가량 되었는데, 흑사병으로 인해 10년도 안된 기간동안 유럽인구의 30%가량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클레멘스6세는 흑사병에 대해 하느님의 진노로 규정하는데,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 시신을 묻을 땅도 없어져 강에 시신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더욱이 아비뇽 교황청 내에서도 10명이 넘는 추기경이 흑사병으로 선종함에 따라 교황 스스로도 압박을 느껴 추기경을 추가로 서임시키는등 질서 유지에 앞선다. 그러나 교황은 이 흑사병이 유대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펼치고 칙서 'Quamvis Perfidiam'을 반포하며, 이러한 교황의 주장에 따라 1348년부터 유대인들은 교황의 주장으로 선동된 사람들로부터 불법감금을 당하다 못해 고문까지 당하며 억지 자백을 하는등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III. 외교
클레멘스6세 즉위 5년전부터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인 백년전쟁(1337~1453)이 발발하였고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가 잉글랜드 카톨릭 교회에 불이익을 주는 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주의를 주고 바로잡기위해 칙서를 발표하여 질서를 유지하려 하지만 에드워드3세는 이러한 교황의 행위에 분노하여 1345년 잉글랜드 카톨릭 성직자들의 모든 성직록을 탈취함으로서 교황에게 보복을 가하는데 거기다가 프랑스 왕 필리프6세마저도 에드워드3세가 취했던 행위를 하면서 다른 나라들에도 이러한 행위가 전파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는 효과가 나버린다. 거기다가 1346년 백년전쟁 당시 초기에 벌어진 가장 큰 전투인 크레시 전투(The Battle of Crécy, 1346.08.26)에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 병력의 3배가까이 되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군에 대패하면서 이후의 전황이 잉글랜드에 유리해지게 되면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3세의 권위가 높아짐에 따라 교황은 잉글랜드의 카톨릭 권위를 미칠 수 없게되는 상황에까지 직면하게 된다.
선종
1352년 12월 6일, 61세의 클레멘스6세는 열병에 걸려 종양이 발생하고 악화됨에 따라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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