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사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Mintaka5 2025. 1. 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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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 화의(The peace of Augsburg or Augsburg Settlement, 1555)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그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출처-위키피디아

경과

1555년 9월 25일, 신성로마제국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신성 로마 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와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간에 강화가 맺어진다. 표면상으로는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가 맺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카를5세의 친동생이자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대변한 신성로마제국 2인자 페르디난트(미래의 페르디난트1세, Ferdinand Ier, 1503~1564, 재위1556~1564)가 주도한 화의이다. 

16세기 유럽의 패자인신성 로마황제 카를5세는 개신교를 특히 강경하게 탄압해왔는데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황제가 약속한 종교인정을 뒤집고 슈말칼덴 동맹이라는 탄압에 찬성하는 동맹을 맺어 제국 내 긴장감이 고조되게 된다. 1530년대에는 오스만 제국 슐레이만 대제(Suleiman Ier, 1494~1566, 재위1520~1566)의 위협으로 제국 내 내전은 없었지만 1540년대에 들어서 신성로마제국 내 내전이 발발하는데 카를5세의 강경진압으로 피로 물들다가 1550년대에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약속을 깨고 아들인 펠리페(미래의 펠리페2세, 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를 자신의 후임 황제로 앉히려고 하면서 형제간의 분열이 생기는데 제국 의회에서는 사실상 형 카를5세와 달리 온건적 실리주의자인 페르디난트의 손을 들어준 제후들로 인해 카를5세는 말년에 사실상 권력을 상실한다.

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갈등을 멈추게 하고 신성로마제국내 각 지방 제후들이 카톨릭, 프로테스탄트중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되었으나, 개인의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었고 지방 제후의 선택에 따른다는 제약이 걸린 것이였지만 공식적으로 프로테스탄트(루터교)가 신성 로마 제국내 공식 승인된다. 프로테스탄트(루터교)가 승인된 것이며 칼뱅파는 제외되었다.

 

루터의 개혁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붙여 종교개혁이 발발한 이후 유럽 전역에 이 물결이 퍼지고 카톨릭계는 이단으로 몰아 프로테스탄트들을 고문하고 화형하면서 탄압을 가하는데, 이 종교개혁의 발산지가 신성 로마 제국 내였기 때문에 더욱 거세게 몰아치게 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내 선제후들도 프로테스탄트를 많이 믿었는데 당시 교황의 지배에 반발해 결속이 되면서 슈말칼덴 동맹(The Schmalkaldic League, 1531)을 체결하기에 이르는데, 신성 로마 황제 카를5세는 이들 루터파가 제국 내 분열을 초래한다고 판단하여 탄압을 가하다가 1546년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마르틴 루터가 사망하면서 이에 루터파 제후들이 거병을 하면서 카를5세는 제국군으로 1547년 뮐베르크 전투(Battle of Mühlberg, 1547)에서 대승을 거두며 무차별적으로 제후들을 탄압하고 굴복시킨다. 

그렇게 1550년 카를5세는 피의 칙령(Blood Edict, 1550)을 내려 프로테스탄트들을 모두 처형시켜 마무리짓고자 하였는데 제후들의 불만이 쌓이고 1552년 전쟁이 끝날때까지 서로 배신과 공격을 반복하며 서로를 물고 뜯는다. 심지어 작센 선제후 모리츠(Moritz, 1521~1553, 재위1541~1553)는 아예 프랑스 왕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까지 끌여들여 카를5세가 있던 인스브루크(Innsbruck)까지 공격하며 카를5세가 피신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마무리

1552년 파사우 조약(The Peace of Passau, 1552)으로 전쟁이 끝나긴 했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었고 오랜기간동안 전쟁동안 2인자로서 제국 내 모든 내정조율을 담당하여왔던 제국2인자이자 카를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를 카를5세 당시 황위를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기로 약속이되어있던 시점에 자신이 퇴위한 이후 황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지 않고 스페인에 있던 아들 펠리페(미래의 펠리페2세)에게 물려주고자 하는것이 페르디난트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형제사이에 분열이 발생한다. 이 일을 가만히 두고볼 수 없던 페르디난트는 제국의회를 설득시키는데, 그 와중 카를5세는 아들이 있던 스페인으로 가서 모든 일을 내려놓고있다가 카를5세는 제국의회로부터 제국의 실권이 페르디난트에게 넘어갔음을 알고는 급히 1553년 아들 펠리페의 황제 선거 출마 포기선언을 하지만 이미 늦어버리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1556년 퇴위할 때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줄 수 밖에 없었고, 아들 펠리페는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로 즉위하게 된다.  

그렇게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후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양측은 종교적 화의를 맺게되며 루터파 프로테스탄트가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건 루터파에만 해당되었고 칼뱅파는 인정되지 못하고 계속 불만이 쌓여오다가 30년 전쟁(1618~1648)이 끝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The Peace of Westphalia, 1648)으로 칼뱅파가 비로소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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