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Fridrich Wilhelm, 1620~1688, 선제후재위1640~1688)
출생
1620년 신성로마제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베를린성에서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Georg Wilhelm, 1595~1640, 선제후재위1619~1640)과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폰 팔츠(Elisabeth Charlotte von der Pfalz, 1597~1660)사이에서 1남 2녀중 두번째로 태어났다.
배경
30년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나 1640년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이 서거하면서 선제후직을 계승받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더이상 황폐화되지 않기 위해 중립적 태도를 취해 신중하게 움직여 피해를 줄였다는 평을 받는다. 30년전쟁 이후 황폐화된 영토를 재정비하고 한동안 내치에만 집중하고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상비군을 조직하여 권력을 공고히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한다. 1675년, 프랑스 왕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의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침공(1672~1678)이 한창일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스웨덴이 브란덴부르크를 침공했을 때 스웨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되면서 대 선제후로 불리게 된다. 이후 1685년 프랑스에서 루이14세가 1598년 할아버지 앙리4세(Henri IV,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1589~1610)가 종교자유를 인정하겠다는 칙령인 낭트칙령을 무효화시키는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하면서 신교도들이 프랑스에서 추방될 때 이들을 받아들여 인구가 많이 늘었고, 이들은 프랑스 내에서 기술직으로 종사하던 사람들이라 프로이센공국의 국력신장에 큰 도움이 된다.
30년전쟁
1640년 선제후직을 승계받을 때 진행되고 있던 30년전쟁(1618~1648)이 한창 진행중이였는데, 이미 피해가 진행중이던 선제후국을 더이상 황폐화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로 중립외교를 실천하며 양측 모두에게 유화적인 정책으로 설 곳을 찾고있다가 결정적으로 30년전쟁이 마무리되기 직전 1648년에 신교도측이 우세함을 목격하고 재빠르게 신교도측에 참전해서 마무리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때 나름 보상을 확보하게 된다. 30년전쟁 이후 공국의 체제를 비상체제로 전환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피해복구를 함과 동시에 이기회에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세금문제, 귀족들을 휘어잡기위해 자기자신에게 충성을 하는 상비군을 창설하고 자신의 선제후국 영지내에 거주하는 주민을 포함해 귀족들의 자제들을 입대시켜 사실상 귀족의 힘을빼놓게 되면서 본인의 권력이 높아짐과 동시에 군인의 수를 늘려 국력을 키우게 되는 이중효과를 거두게 된다.
외교전략
I. 국익이 최우선
당시 유럽의 두 권력축 프랑스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와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1세(Léopold Ier, 1640~1705, 재위1658~1705)간의 경쟁속에 이용할 틈을 찾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국의 국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했다. 여러차례의 전쟁과 조약을 이용해 전략적 동맹을 취하고 협상을 취해 우위점을 선점해 전후 조약으로 국익을 취하는 형식으로 상황에 따라 외교전략을 취하는등 최대한 국익을 취하고자 했다.
II. 스웨덴과의 전투
1674년 한창 프랑스-네덜란드 전쟁(다른국가들까지 참여한 큰 전쟁, 1672~1678)이 벌어지고 있을 때, 프랑스 편이였던 당시 강대국이였던 스웨덴 왕국군과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군간에 전투가 벌어진다. 프랑스 루이14세의 군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1세와 같이 원정에 합류했을 시점에 스웨덴을 꼬셔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국을 공격하게끔 한다. 이 소식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즉시 군대를 선제후국으로 돌린다. 얼마나 급했으면 1675년 5월에 출발해 2주만에 250km에 달하는 거리를 행군하면서 선제후국 입구쪽에 해당하는 마그데부르크에 도착한다. 스웨덴군은 이렇게까지 금방 도착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못하고 분산되어있다가 페르벨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의해 대패하고 철수함에 따라 승기를 잡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스웨덴 포메라니아로 진격하게 된다. 이 전투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대 선제후'로 이름알려지게 된다.
III. 퐁텐블로 칙령
1685년 프랑스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가 할아버지 앙리4세가 반포한 낭트칙령(종교자유, 1598)을 폐지하고 퐁텐블로 칙령(종교 억제: 신교도들 인정못한다)을 반포함에 따라 프랑스 내 신교도들이 추방당하거나 붙잡히기전에 프랑스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 소식을 듣고 재빠르게 프랑스에서 쫓겨난 위그노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프로이센의 인구증가와 더불어 국력발전의 계기로 삼게된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쫓겨난 위그노들은 프랑스 내에서 기술직으로 종사하던 사람들이 꽤 많았기에 전문기술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전례없는 기술발전을 목격하게 된다.
사망
1688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한치의 게으름도 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선제후로서 근무를 태만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재위기간동안 그의 검소한 태도로 낭비벽이 없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국의 국력이 크게 신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