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jong de Joseon, Gojong de Corée, 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
출생
1852년 조선 한성부 운현궁 사저(흥선군 저택)에서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흥선대원군, 1821~1898, 섭정재임1863~1873)과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1818~1898)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이재황→이희.
배경
조선 말기 군주로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때 군주로 있던 인물로 긍정, 부정평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인물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으로 인한 침략과 한일합병과 더불어 1800년대말 열강들의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정계는 정치다툼이나 하고 앉아있었으니.. 말그대로 개판5분전이였던 시기. 격변의 시기를 보낸 군주로서 아직도 연구가 진행되고있다. 이래서 이랬다라는 답을 내기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는 군주다.
험난하네..
아버지 흥선군은 남연군(인평대군6대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 1788~1836)의 4남이다. 앞선 설명과 같이 인평대군(인조의3남, 1623~1658)의 6대손이지만 남연군은 아들없이 사망한 은신군(사도세자의서자, 1755~1771)의 양자로 입적되어 남연군에 봉해진 것.
24대 헌종(1827~1849, 재위1834~1849)가 후사없이 승하하게 되면서 방계가문 이원범이 25대 철종(1831~1864, 재위1849~1864)으로 왕위가 이어지지만 철종역시 후사없이 승하하면서 철종의 17촌인 이재황(고종)에게 간다. 흥선군은 재황을 효명세자(추존왕 익종, 추존황제 문조, 1809~1830)의 양자로 입적되는 조건을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세자빈 조씨(추존 신정왕후, 1809~1890)에게 제시하고 신정왕후는 이를 받아들여 왕위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고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라 하여 재황에게 익성군으로 봉하게 된다.
그렇게 철종이 1864년 승하한 후 재황이 조선 26대 고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아부지 언제까지 하실거요?
1864년 고종이 즉위하지만, 12세에 불과해서 통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왕대비인 조씨(신정왕후)와 흥선군이 흥선대원군으로 올라 같이 집권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여 세도정치의 핵심 세력이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여흥 민씨등을 권력에서 배제 시킨다. 양전 사업 실시(토지제도)로 국가재정 확보, 경복궁 중건등의 업적을 내어 조선을 이끈다.
병인양요
1866년 10월경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시기에 프랑스 군대가 병인박해(1866)로 인한 프랑스 선교사9명의 사망을 명분으로 프랑스 극동사령관 로즈 제독(Pierre-Gustave Roze, 1812~1883)이 전투를 일으킨다. 1차침공땐 양화나루까지 올라와 순찰만하고 조용히 물러났지만 2차침공땐 강화도를 침공한 후 점령하고 통상수교를 요구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쇄국을 1목표로 하여 거부함으로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공격하면서 강화 이궁(임시궁궐)에 방화를 저지르고, 외규장각 도서, 문화재등을 약탈하고 파괴를 자행하면서 난리가 난다.
이로인해 흥선대원군은 더욱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력하게 실시하게 된다. 이후 비변사까지 혁파.
신미양요
1871년에는 미국과 부딫히게 되는데, 1866년 미국과의 통상거절로 인해 대동강에있던 제너렬 셔먼 호를 평양 관민이 합해서 전투를 벌이면서 미국 함선을 침몰시키면서 발단이 시작되는데, 1866년 말부터 해군제독이자 외교관인 로버트 슈펠트(Robert Shufeldt, 1822~1895)가 통상교섭 문서를 조선 정부에 보냈는데, 조선 정부는 요구를 거절. 1867년에는 군함 새넌도어 호를 보내 제너럴 셔먼 호 생존자를 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하는데 조선 정부는 생존자는 없다고 답변하고 새넌도어 호가 대포를 쏘며 무력시위하여 조선도 총을 쏘며 저항해서 돌아감.
빡친 미국은 1868년 조선 정부에 새넌도어 호에 총격을 가한 일과 관련자 처벌과 동시에 사과를 요구하는데 답이 없을 시 다시 쳐들어올거라고 협박. 답이 없자 1871년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하기로 결정하고 군함을 보낸다.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 1812~1882)가 전함5척에 6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오게된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서도 여러번에 걸쳐 미국 군함이 올거라고 예고받았기 때문에 교전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에서 미군과의 교전이 일어나면서 신미양요가 발발하고 결과적으로 미군이 승리하였지만 조선입장에서도 결사항전으로 미군 군함들을 몰아낸 성과를 냈다.
흥선대원군은 이일로 더욱 빡쳐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차원에서 전국에 척화비들을 세우게 된다. 계속된 통상교섭 거절은 덤으로.
드디어 친정?
위정척사파로서 처음엔 대원군의 섭정을 지지하던 최익현(1833~1907)이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는데, 1871년 흥선대원군이 영의정 김병학(1821~1879)과 합심해 문묘종사된 서원을 비롯해 47개의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들을 정리한 사건이 벌어지는 서원철폐령이 실시된다. 명분은 당쟁의 폐단, 적폐를 철폐하겠다는 것으로 이를 실시한다. 이에 최익현은 더욱이 대원군에 적대적으로 변하게 된다.
1873년 최익현이 동부승지로 승정원에 기용되면서 흥선대원군과 완전히 적대하게 된다. 이때도 역시 대원군의 전횡과 정책을 계속해서 맹렬히 비판하게 되면서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키기에 이른다. 이로서 고종은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되는 판이 마련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 계열인 여흥 민씨에 의한 세도 정치가 또 새로 시작되게 된다.
운요호 강화도조약
1875년 일본이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하기위해 군함 운요호가 불법적으로 강화도에들어와 염탐하다가 조선군과 전투가 벌어지면서 군함 1척이 소실되는데 이 군함이 운요호이다. 애초에 불법적으로 들어와서 난 사건인데 이런 일본은 도리어 사과도 없이 1876년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 정부에 떠넘기면서 무력으로서 개항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조선과 일본측은 회담끝에 불평등 조약을 조인하게 되면서 3개의 항구(부산, 원산, 인천)가 순서대로 개항하게 되고 12조로 구성된 문서로서 체결되는데 이게바로 조일수호조규 또는 강화도 조약이라 불리는 불평등 조약이다(1876년 2월 27일). 이 조약으로 일본 제국주의 식민주의적 침략이 시작되게 된다. 12개 조약 모두를 언급하기에는 많고, 불평등 조약으로 보는 근거 3개의 조항을 언급해보겠다.
조약 내용 | 불평등 조약 근거 | |
제5조 |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해야한다(부산1876년, 원산1879년, 인천1883년으로 20개월보다 지연됨) | 경제적, 군사적, 침략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야욕 |
제7조 |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 | 해안측량권인정, 영해 주권 침략 |
제10조 |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해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조선 관리가 심판하지 않고 일본 관리가 심판한다는 것) | 치외법권 침해 |
위정척사운동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개화운동을 전개하고 개혁을 실시하게 되면서 첫 시작으로서 군제개혁을 하며 일본식 군제를 도입해 신식군대인 별기군(1881)을 조직, 행정개혁으로 청나라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근대식 관청 통리기무아문(1880)설치등을 하는데 이런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또한 이루어지게 된다.
대원군때부터 시끄러웠던 이 일은 개항찬성파 개항반대파로 나뉘어 시끌시끌 해진다. 아까 언급했던 최익현(1833~1907)또한 위정척사파로서 개항반대를 외친 대신이였다.
임오군란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신식군대 별기군이 창설되고 난 이후 구식군대에서는 신식군대와의 차별과 함께 급여를 받지 못하는(이건 좀 선 씨게 넘었지..)일이 벌어지게 되면서 구식군대 군인들이 불만이 폭발한 임오군란이 1882년 발발하게 된다. 이들은 이렇게 된 이유이자 원흉이 여흥 민씨 세도세력과 명성황후 민비(1851~1895)로 생각하여 잡으러가지만 명성황후는 피신완료. 흥선대원군 또한 이때 마침 구식군대 군인들이 추대해서 재집권하는데 성공하지만 청나라의 군사개입으로 강제 진압되어버리고 대원군은 청나라로 압송.
이후 청나라는 내정간섭을 하게 됨.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어버리면서 시끌시끌해지는데, 이때 일본 공사관이 군인들과 시민들에 의해 습격당하면서 피해자들이 나오게 되면서 일본에서 무력으로 교섭을 또 추진하게 되면서 교섭대신 하나부사 요시미토 공사(1842~1917)가 제물포에서 조선측 전권대신 이유원(1814~1888), 공조참판 김홍집(1842~1896)과 회담을 진행한 결과 6개 조항의 조선으로선 또다른 불평등조약인 제물포조약(1882)이 체결된다.
갑신정변
1884년 급진 개화파가 수구세력(사대주의)을 몰아내고 정권을 바꾸려고한 쿠데타가 벌어지는데, 정권이 3일만에 끝나버려 3일천하라고도 불리는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장소는 우정국 낙성식 현장.
이 정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피신시키고 여흥 민씨 세력을 축출. 3일만에 개혁정책을 내놓지만 민씨 세력은 청나라 위안스카이(1859~1916)에게 구원 요청을 하고 민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개화파는 반대했지만 민비의 강력한 요구로 창덕궁으로 환궁. 그러나 민씨 세력이 부른 위안스카이의 청군1500명이 창덕궁에 쳐들어오면서 개화파가 무참히 밟히면서 3일만에 진압되어 정변이 끝난다. 이때 개화파는 붙잡혀 처형되거나, 해외로 망명하게 됨.
갑신정변의 주축 세력은 숫자가 꽤 되어 4명정도 핵심인물을 올려놓겠다.
생몰년도 | 최종직위 | 갑신정변 실패 이후 | |
김옥균 | 1851~1894 | 호조 참판 | 청나라 상하이에서 홍종우(1850~1913)에게 1894년 암살 |
박영효 | 1861~1939 | 한성부 판윤 | 일본에 망명후 머물러있다 다시 귀국해 갑오개혁 주도, 친일인명사전 등재인물 |
홍영식 | 1856~1884 | 우정국 총판 | 처형 |
서재필 | 1864~1951 | 중추원 고문 | 독립운동 지원, 1948년 미국 출국후 1951년 미국에서 병사, 의학박사 |
동학농민운동
I. 1차봉기 : 고부 봉기
1864년(철종15년)에 천주교와 같이 사학으로 지정된 동학을 이끌던 교조 최제우(1824~1864)가 처형당하고 시간이 훌쩍 지나면서 1882년이후 각종 사회문제 대두, 정치적 혼란등의 문제로 민심이 요동치다가 고부 군수 탐관오리 조병갑(1844~1912)은 민비에게 뇌물을 바쳐 매관매직으로 군수가 되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부를 착복하는 악질중의 악질 관리였는데, 이 횡포가 도가 넘게 되면서 1894년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기에 이르는데 농민운동가인 전봉준(1855~1895)등을 포함한 농민들이 규합해 동학농민운동을 발발시킨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 1차봉기인 고부 봉기인데 정부에서 안핵사(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시 처리를 위해 임명된 임시관직)이용태(1854~1922)를 보내 탐관오리들을 척결하고 농민들을 위로하면서 해산된다.
II. 2차봉기 : 전주성
그러나 사태수습하기위해 보내진 안핵사 이용태가 1차봉기를 혁명이아닌 반란으로 규정해 관련자들을 모두 동학도로 몰아 심지어 전북, 충남지역의 농민들까지 동학도로 몰아 처벌하게 하는데.. 이에 전봉준을 포함한 농민들은 무장 후 다시 봉기하게 되는데 이가 2차봉기이다. 이들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삼고 1차봉기 2달만에 다시 모여 전주성을 점령해버린다.
조정에서도 질세라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1842~1895)을 임명해 진압케끔 한다. 여러차례의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농민군들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빌미를 주지않기위해 전주화약(1894)을 맺고 해산하게 된다.
III. 갑오개혁
청나라에 원병을 응한 민씨세력과 이에 질세라 일본도 텐진조약(1885) 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한다. 아래표는 텐진조약 내용.
내용 | |
제1조 | 청, 일 양국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
제2조 | 조선 정부가 군대를 훈련하여 스스로 치안을 지키게 한다. |
제3조 | 조선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할시 청, 일 양국 중 어느 한쪽이 파병하게 될 때에는 우선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리고,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고 주둔하지 않는다. |
일본은 청나라가 텐진 조약 제3조를 위반하였다 판단하여 조선에 군대를 동원하게되면서 관군과 농민군은 회담을 통해 잠시 싸움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심지어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침범하는 갑오왜란(1894,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는 과정에서 조선군과의 전투)을 일으켜 민씨세력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앉혀 꼭두각시로 삼게되는데 이로 친일 내각이 출범하게 되어버리는데 이 내각구성원은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등등이다.
친일내각이 자주적인 개혁인 전주화약을 간섭한 사건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IV. 청일전쟁 & 대일 농민전쟁(3차봉기)
일본은 갑오개혁 이후 조선에 주둔하고있던 청나라군을 기습공격해 승리한뒤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게되는데.. 이것이 청일전쟁인데 1894~1895년에 걸쳐 6개월정도 지속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며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더 강화하기에 이르게 되고, 이 행태가 점점 심해지면서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이 이제는 대일 농민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압도적인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패배. 1894~1895년은 청나라, 조선, 일본 3국의 전쟁터가 조선이 되어버리면서 초토화가 되어버린다.
러시아?
I. 을미사변
이런 난리이후 고종은 조선내에서 세력이 급부상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이용하더라도 몰아내려고 하는데, 마침 김홍집내각이 1895년 들어서게 되는데 김홍집은 친러성향으로서 마침 뜻이 맞던 차에, 일본이 조선왕실이 친러성향을 가져 자기들이 곤경에 처할 것을 두려워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을미사변(1895)이다.
김홍집은 1895년 말 을미개혁(3차 갑오개혁)을 실행해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우체사와 소학교 설치, 군제개혁, 단발령등을 실시하기에 이르고 이는 다음에 다룰 아관파천직전까지 진행되게 된다.
II. 아관파천
1896년 2월, 고종이 아들 이척(순종, 1874~1926, 재위1907~1910, 연호 '융희')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되는 1년간의 아관파천(사실상 망명, 1896. 02. 11~1897. 02. 20)이 단행되게 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을미4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의 척살을 지시하게 된다. 이로서 김홍집 내각은 끝.
생몰년도 | 내용 | |
김홍집 | 1842~1896 | 아관파천때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음, 일본이 세운 내각총리 |
유길준 | 1856~1914 | 흥사단 조직, 독립운동가, 긍정 부정평가가 동시에 존재함 |
정병하 | 1849~1896 | 아관파천때 역적으로 몰려 암살 |
조희연 | 1856~1915 | 아관파천으로 일본 망명, 친일파,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장석주(장박) | 1848~1921 | 법부대신, 친일파 |
대한제국
고종이 1897년 2월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환궁해 환구단을 짓게되며 국호를 대한제국(황제국)으로하고 황제로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대한제국 초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황제가 된다고해서 크게 바뀌는건 없던 상황.
I. 광무개혁
어쩄든 새로운 제국의 선포로 광무 즉위 원년으로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광무개혁(1897~1904)을 실시하게 된다. 뭐 황권강화를 1순위로 추구하고, 군사 대폭증가, 무관학교 설립, 단발령 재개(?)등으로 당시 외세의 간섭으로인한 작고의 현실을 타파하기위해 국력을 증강시키려는 일종의 노력. 그러나 재정의 원활한 흐름없이 개혁을 하려고했던 탓에 개혁 실패.
황권강화는 전제군주국으로서 시행한 정책인데 이미 당시 세계적으로 입헌군주제 바람이 훨훨 불어온지 오래되었던 상황이였고, 대한제국내에서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있었지만 수구파의 모함으로 협회해산.
II. 커피맛이 좀 이상한데?
1898년 김홍륙(?~1898)이라는 역관이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탄 커피를 주게되는데, 이는 커피매니아였던 고종(황실카페 정관헌까지 설립하심)을 암살하기위해 아편을 탔는데, 고종은 마침 이상함을 느끼고 커피를 바닥에 붓지만 불행하게도 황태자 이척(순종, 1874~1926, 재위1907~1910, 연호 '융희')이 이 아편커피를 마시게 되어버리면서 이가 모두빠지고 복통, 설사등이 나타나며 이후 후유증에 시달리게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김홍륙을 잡아다가 교수형에 처하고 9족을 멸한다.
러일전쟁
1904년(광무7년)에는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이 나게되는데, 이는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기위해 일본이 강행한 전쟁이다. 모든 열강들은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일본이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과는 일본이 2배정도의 병력차이를 극복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하여 사상자가 비슷비슷하고 일본의 전쟁지출이 너무 커지게 되면서 협상을 하게되며 미국의 주도하에 포츠머스 강화조약(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으로 전쟁을 일단락시킨다.
이제 끝인가..
계속된 일본의 야욕이 결국은 1905년 을사늑약이 일본에의해 강제로 체결되게 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게 되는데, 일본군을 강제로 동원시켜 반협박식으로 체결시킨다. 이 을사늑약때 체결을 찬성했던 을사오적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한다. 아래표로 정리.
생몰년도 | 직책 | |
이완용 | 1858~1926 | 학부대신 |
이근택 | 1865~1919 | 군부대신 |
이지용 | 1870~1928 | 내부대신 |
박제순 | 1858~1916 | 외부대신, 늑약직접체결 |
권중현 | 1854~1934 | 농상공부대신 |
하야시 곤스케(1860~1939)와 박제순이 체결하게 된다. 1905년엔 미국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재임1909~1913)와 가쓰라 다로(1848~1913)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일본의 대한제국 종주권을 인정받게 되어버린다.
이로 한국내 공사관들이 모두 철수하게되고,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게 되고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며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가 벌어지며 국가가 완전히 일제에 넘어가게 된다.
승하
1907년엔 황태자 이척에게 황위를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물려주게 된다.
1919년 68세로 승하하게 되는데, 사망원인이 밝혀지지도 않고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3.1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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